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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옥과 지옥 사이
    산하령(천애객) 2021. 9. 8. 19:54

    * 이 세상에 존재하면 안 될 악인들을 18층 지옥으로 보내겠다고 하던 온객행의 대사가 여전히 뇌리에 스쳐서 끄적인 글 

    * 대강 용연각 찾아가기 전의 며칠 동안 가는 시간이 있었을 테니 그 사이 어딘가 날조 

     

     

    이 길이 계속 이어지길 바라는 것은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머릿 속에서 오랫동안 머물며 뇌리에서 떠나가질 않는다. 나는 뭘 하면 좋지? 미친듯이 생각하는 걸 그만 두어도 끝까지 쫓아오는 공포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공포라는 감정이 가득 지배한다. 마치 영혼을 옥죄듯.. 일정한 주기적으로 반복된 고통에 오늘도 괴로움을 이 악문 채 버텨내야 하였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짓을 해야만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순간의 오차가 있음을 간과하지 못했다는 점은 알 것 같았다. 

    모든 것은 한꺼번에 지나가버린다. 바닷가의 파도처럼, 하늘의 폭풍처럼 계절도 시간도 운명도 소용돌이처럼 휘말려 집어삼킨 채 사라진다. 하지만 한번 휩쓸려 가버리고 난 뒤 남은 것은 흔적조차 사라져 아무것도 전혀 남지 않았다. 거짓말- 거짓말이다. 사계절 내내 피는 꽃은 모든 것을 안다고 했는데 지금에야 와서 그것을 부정했다. 지금까지 줄곧 긍정해왔다고 생각했던 건 단순히 저만의 착각과 편협에 의한 안일함 뿐이었다. 이미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는데 무엇을 알까? 바보 같다. 

    지난 번의 일이 쉽사리 가시지 않아 조금 궁금해졌다. 하지만 그는 나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그때 마다 주먹을 쥔 채 몸을 부르르 떨어대며 화를 주체하지 못할 뿐이다. 그래서 더 알고 싶어졌다. 무엇을 너를 사지로 내몰 만큼 가슴에 증오를 품게 만들었는지, 나는 알고 싶었다. 활활 타오른 불길은 너무 크게 번져가 감히 가까이 다가갈 수 없기에 점점 두려워졌다. 생각해 보면 너는 나에 대해 알려고 다가오지만 녀석과 함께 어울리게 되면서 단 한번도 너에 대해서 무언가 알려는 시도 따윈 하지 않았다. 

     

    너는 누구지? 너는 어떤 사람이야? 

    그리 생각할 참이다. 곁눈질로 한참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물론 네 시선을 몰래 피해서다. 아니면 또 무슨 생각 하냐고 한 마디 할 터이지. 쓸데없는 장난을 걸어올지도 모르고. 조용히 관찰하는 게 차라리 나을 거라 판단한 이유다. 20년 전 용현과 유리갑에 대한 진실을 찾기 위해 속히 이동하던 중간에 사건이 일어났다. 왜 불길한 예감은 항상 틀리지 않는가-

    엽백의는 용연각으로 가기까지 아주 험난한 여정이 시작될 거라 생각했는데 설마 벌써부터 그 최악의 한 걸음이 될 줄은 몰랐다며 혀를 찼다. 못마땅한지 연신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검을 빼어들었다. 나도 일단 백의검을 가볍게 잡았다. 

    "어이, 진회장의 제자- 용연각까지 갈 길이 멀다. 여기 이런 데서 쓸데없이 지체할 수 없어~ 적당히 따돌려라" 

    "엽 선배도요." 

    "온객행, 너도 빨리 움직여!" 

    "말 안 해도 알거든!" 

    검을 다시 내질러 휘두른 뒤 옆을 돌아보았다. 너는 언제나의 백색 부채를 손에 들고 무공을 펼쳤다. 화려하진 않으나 그러면서 단조롭지 않은, 가히 살기와 광기가 만연하게 깃들여져 있었다. 왠지 몰라도 순간적인 직감이라고, 확실히 그렇게 느꼈다. 어디까지나 그저 단순히 직감일 뿐이다. 멋대로의 판단은 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 어쩐지 꼭 그래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다. 

    이건 특별한 기분이다. 흘러오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서 제 주제에 말이다. 오감을 거의 잃어가는 나라도 직감은 사람은 가끔 이성이 아닌 감각대로 행동하는 존재다. 그렇기에 나는 사람으로써 그 직감을 믿고 싶다. 그 감각이 두 번 다신 되돌릴 수 없는 것이라 해도 지금 믿지 않으면 언젠가 엄청 후회하게 되버릴까봐── 

    "오호맹도 귀곡도 모두 똑같아~ 위선자들 뿐이지" 

    "뭐라고?" 

    어째 아까부터 옆에서 내심 불안하다 했는데 결국 터질대로 터져버리고 말았다. 근거 없는 소문은 유언비어일 뿐이다. 이상한 말들로 네 마음을 흔들어 놓더니 함정에 걸려들듯이 화를 내며 폭발했다. 엽 선배가 무어라 떠들어 댔는데 멍하니 너의 얼굴만 쳐다보다 잘 듣지 못했다. 네다섯 번쯤 불러서야 겨우 엽 선배가 나에게 저 녀석 좀 말려, 라고 외치는 걸 알아들었다. 

    주 사부가 가르쳐준 유운구궁보를 하던 장성령의 발도 멈췄다. 허나, 너는 가슴 속 깊이 솟아오르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모조리 끌어냈다. 엽 선배가 분명 적당히 따돌리기만 하라 했는데 백색 부채가 부메랑처럼 날아갔다가 온객행의 손에 돌아왔을 땐 그를 말리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여야 했다. 마침내 정말 사람들을 전부 죽여버렸다. 

    "노온, 정말 왜 이러는 거야?" 

    "뭐가?" 

    "몰라서 물어?" 

    "무슨 말이야? 아서, 알아듣기 쉽게 말해" 

    "왜 굳이 죄 없는 사람까지 죽였어?" 

    "반드시 드러나는 잘못이 있어야만 죄가 성립 되나" 

    싸움은 크게 번졌다. 장성령이 말릴 수 없을 정도의 말다툼이 계속 이어졌다. 대화를 이어가긴 무리였다. 그렇지 않아도 서로 입장이 난처해진 마당에 손을 쓸 수 없을 것 같았다. 엽백의도 곤란해져서 퉁명스레 한 소릴 던졌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꼭 그런 것만은 아냐~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뭐?" 

    "강호인들은! 세상 사람들은! 어째서 모두 흑백으로 나누는 거야? 대체 그 기준을 누가 정했는데? 인간과 악귀로 구분 지은 채 자기합리화나 하는 거, 결국 전부 모순이거든" 

    "나도 네 마음 모르는 거 아니아~ 그렇지만 적어도 이성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잖아" 

    "이성적? 허, 지금 이 상황에서 이성적이란 말이 나와? 아서, 타인의 마음까지 그렇게 멋대로 다 안다는 듯이 말하지 말아줄래?" 

    "노온!" 

    "그 이상 입을 열지 마~ 나는 그저 나답게, 인간답게 살고 싶었을 뿐이야!" 

    그 순간 알았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확실히 잘 모르지만 이거 하나만은 알 수도 있을듯 성 싶었다. 온 세계가 전부 증오로 가득 찬 사람. 가슴 속에 무언가 엄청난 짐을 끌어안고 있는 사람. 또한, 그 짐을 혼자서 모두 끌어안고 끌어안다 못해 너무 무거운 짐의 무게에 결국 스스로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히며 힘들어 하는 사람. 그리고 이제 더 버텨낼 자신이 없어 가식과 거짓말로 보호한 채 자조 섞인 미소만을 내보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온객행이란 사람이 좀 더 궁금해지기 시작하였다. 대체 누가 그를 이렇게 만든 것인가. 

    한 차례 거센 폭풍이 휘몰아 친 후 잠시 근처의 동굴에서 하루 쉬어가기로 정했다. 용연각의 소각주인 용호가 또 뭐라 떠들어 댔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약간 얼 빠진 것 같기도 한듯한 너를 보면서 성령이가 걱정하는 눈빛으로 온숙을 불렀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이번에는 나를 보고서 사부라고 불러댄다. 품 속에서 적당히 가져온 빵을 꺼내 알아서 저녁을 먹으라고 일러준 다음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연히 네 상태를 살필 겸이라는 좋은 명목을 둘러댄 것은 덤이었다. 그러나, 그 앞을 가로막는 엽 선배에 의해 간단히 제지되었다. 

    "진회장의 제자, 저 녀석은 나한테 맡기고 너는 네 제자랑 같이 저녁이나 먹어라" 

    "선배, 제가 가서 보고 오는 것이.." 

    "어허- 내 말을 거역할 셈이냐~ 지금 누가 누구의 상태를 살피겠다고..."

    선배는 그렇게 노온에게 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흰 옷자락이 가볍게 나풀거렸다. 움직일 때 마다 긴소매의 옷자락이 펄럭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래도 퍽 선배다운 분위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약간의 자신감이 찬 표정과 너와 나 사이의 관계를 보던 순간에 종종 느껴진 엽 선배 특유의 오랜 세월의 무게감이 보여지는듯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단 정도로만 조금 생각하고 말았다.

    "안에 안 들어가고 왜 그러고 서 있어?"

    "......"

    "어쭈-무시해? 저 기분 나쁘나고 이제 아예 들은 척도 안 하시겠다..?"

    "늙은 요괴는 가만히 있는 것이 도와주는 거거든요."

    "태클 걸 상황은 되나 봐~ 진회장의 제자 놈이 네 상태 보겠다고 난리치는 걸 내가 대신 왔는데 선배에 대한 감사는 없는 거냐"

    ".... 그래서 할 얘기가 뭔데요?"

    "아깐 왜 그랬어~ 무엇이 그리도 널 화나게 만드는 거야?"

    "알아서 뭐하게요."

    "알 필요가 있을 것 같거든"

    "..... 별 거 아니예요. 그저.."

    "그저?"

    가끔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있다. 모두 제가 잘났다는 우월감. 그 우월감으로부터 온 환상을 멋대로 믿어버리고서, 또 마냥 우월주의에 빠져 나락을 허우적거린다. 자신도 같은 부류는 아니었나 싶은 생각은 들지만 그럼에도 사람은 누구나 가슴 한구석엔 무언가 지옥과 지옥 사이에서 실낱 같은 조그만 희망을, 기적을 믿어보고 싶어한다.
    원한 많은 악귀로서 세상을 떠돌아 다녀도, 결코 인간과 귀신이 가는 길은 다르다는 걸 알면서도 그 마음을 포기할 수 없었다. 온객행은 살짝 뜸을 들이다가 검은 눈동자를 허공에다 응시한 채 말을 이었다.

    "그저 사람들은 왜 흑백으로만 나누는 거죠?"

    "오호맹 같은 정파 놈들 말하는 건가? 그러는 넌 어째서 이리 극단적인 건데?"

    "극단적이라.. 그럴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이 세계는 훨씬 더 극단적인 걸요. 한쪽 단면만 본 채 그림자 뒤에 숨어서 논리적인 척 하는 태도, 저는 그게 정말 화가 하거든요."

    "뭐가 말이냐"

    "더 이상 메마른 대지에 사랑이라곤 존재하지 않잖아요. 그런 옛 성현들이나 말하는 낡은 가르침 같은 건 필요없어요. 가끔 생각해요. 사람의 온기조차 사라진 지금의 세상이라면, 그런 세계 따윈 차라리 망해버리라지-!!"

    "그래도 아직 이 세계는 그럭저럭 살만 해~ 어둠에 물들여 타락해버릴 정도의 마음에도 분명 따스함이 남아 있겠지~ 그러니까 희망은 있는 거라고-"

    "희망? 이미 빛을 잃어버린지 오래인데 무엇을 더 바랄까"

    "훗- 너도 의외로 꽤나 진지할 때도 있군"

    "겨우 어렵게 속마음 꺼내놨더니 하는 말이 뭐가 어째?!"

    "아무것도 아니다. 신경 꺼"

    "......"

    "돌아가자~ 가서 잠이나 푹 자 둬- 어차피 내일 또 계속 걸어야 돼"

    어두운 공간을 헤집고 너는 엽 선배와 함께 돌아왔다. 괜히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있자니 어색할 뿐이다. 물론 성령의 말 한 마디에 금방 냉랭함이 감돌던 기류가 풀어진 우리들이었지만. 엽 선배는 이미 아무렇게나 괜찮은 자리를 찾아 팔베개를 한 채 누웠다. 각자 빨리 알아서 잠이나 자라고 성화다. 아까 전보다 기분이 조금 풀린 모양인지 네가 하늘 같으신 선배님의 말씀이니까 어쩌겠어.. 따라줘야지, 하고 태클 걸며 얄미운 소리를 내뱉다가 두 사람이 무공을 펼쳐 싸워들려는 것을 간신히 어르고 달래 최악의 상황을 막았다. 그러고 보면 은근히 저 둘, 묘하게 호흡이 잘 맞는듯 하단 말이지.

    딱히 일찍 잠이 오지 않아 명상에 들어갔다. 7개나 독이 든 못을 박아 넣어버린 칠규삼추정 때문에 그런 식으로라도 마음을 진정시켜야 했다. 단전에 기를 모으고 명상을 끝낼 즈음 세 사람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아니, 용 소각주를 포함하면 실질적으로 일행 넷이 되는 건가. 한 사람이 난리 안 치면 다른 사람이 미쳐 날뛰던 하루도 어느 새 밤이 깊어갔다. 다음 날 하루는 또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생각하면 벌써부터 몸이 떨려온다. 남은 시한부 인생 조용히 살겠다고 다짐했는데 아무래도 이번 생은 글러먹었나 보다. 하늘을 탓하진 않았지만 무심한 운명의 법칙과 순리는 좀 원망스러웠다.

    이 세상에 존재하면 안 될 악인들을 18층 지옥으로 보내 버리겠다던 노온의 말을 기억한다. 아마 머릿 속에서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18층 지옥이라..' 나는 잠든 그의 얼굴을 바라본 채 그 말을 몇 번이나 되내었다. 살며시 손을 뻗으려다 그만두었다. 나는 그냥 그 옆자리에 누워 억지로 오지 않는 잠을 청할 뿐이다. 작고 평범한 일상들이 단 한번도 소중했던 적 있었던가? 뒤늦게 후회하면서 내일은 불안한 미래가 조금 더 밝았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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