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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하령 본편 완결 이후 주자서가 우연히 평행 세계의 주자서를 만나게 되면서 이리저리 사건에 휘말리는 무언가의 스토리
* 원작 천애객의 설정이 들쑥날쑥 들어가 있음~ 어차피 애초에 무공 쓰는 세계관부터가 판타지인데 평행 세계 이동하는 정도야 뭐....
01. Start 가슴의 고동
그날도 그랬다. 이미 천창의 전 수령이란 수식어, 시간이 흐른 지금도 그 악명을 달고 사는 그가 인생에 있어 새로운 분기점으로 뛰어들게 됐을 줄은.. 아마 상상조차 하지 못할 만큼 꿈에도 몰랐다.
주자서는 조금 밝은 파란색 계열의 옷에다가 진한 남색 바탕의 도포를 걸쳤다. 온객행은 온객행 대로, 주자서는 주자서 대로 각자 여행 길에 올랐다. 언제 한 번쯤 혼자서 정처 없이 천하를 돌아다니겠단 다짐했던 것은 이번에야말로 비로소 그 꿈을 이룰 수 있을 성 싶었다. 모두의 예상을 깨뜨리고 온객행은 흔쾌히 승낙해버리고 말았다. 그동안 너무 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엔 아직 많은 시간이 더 필요했다. 산과 물을 넘어 자신의 행복을 찾아 새로이 떠난 여행은 전혀 다른 곳에서 일어났다.
생각을 고려하지 않고 걸었던 듯 했다. 주자서는 어느 한 마을의 객잔에 들어선 뒤 자리에 앉았다. 일단 술을 주문한 후 턱을 괸 채 가만히 넋이 빠져라 멍하니 있는데 맞은편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몇몇 사람들이 서로 술잔을 기울이며 무언가 막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그들은 몹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 칠규삼추정의 저주도 사라졌고 오감도 다시 완벽하게 보인 만큼이나 시각도 청각도 미각도 전부 느낄 수 있었다. 맞은편에 모인 자들은 다소 과장스러운 손짓을 해가면서 제각기 다양한 역동적인 움직임을 펼쳐댄다. 멀리서도 아주 잘 들렸다. 넌지시 귀를 기울어 들으니까 무슨 괴담 이야기가 주제인듯 한창 토론을 벌였다. 대강 괴담의 내용을 들은 바론 요즘 이상한 숲이라는 존재가 유행인 것 같다.
어떤 젊은 청년 한 명이 그날 밤 술에 잔뜩 취해 비틀비틀 거리를 걸었는데 사람의 본능이란 건 예민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어 퍼뜩 정신을 차렸다고 한다. 왜인지 이유를 모르겠으나 순간적인 본능에 의한 감각이었다고 일행 중 하나가 설명을 덧붙였다. 그랬더니 주변에서 알 수 없는 인기척도 들리고 동물 비슷한 울음소리도 났더란다. 날이 너무 어두워 귀신인지 아닌진 구분이 안 되어 확인을 하지 못했지만 오싹한 느낌은 받았다고..
일행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다른 남자가 대화를 이어받길, 그 청년이 하도 기괴스러워서 열심히 희뿌연 안개를 헤치고 나오자 한번도 가본 적 없는 낯선 장소에 와 있었대, 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반쯤 괴담을 믿는 눈치였고 또 다른 나머지는 괴담은 괴담일 뿐, 말도 안 되는 허황된 이야기라며 믿지 않았다. 아닌 척 하기엔 무언가 강한 호기심이 일었다. 그는 돈을 세어 탁자 위에 얹진 후 남은 술을 마저 마시고 일어나 객잔을 나왔다.
예의 그 숲을 찾아갈 생각이다. 가끔은 허황된 이상에 빠져버려도 나쁘지 않겠군. 혼자 나지막히 중얼거리면서 아직 한창 날이 밝은, 그러나 아랑곳 하지 않고 녹음이 우거진 안쪽을 향해 이동하였다. 주자서가 막다른 숲 속을 가로질러 들어서자 저 멀리 희미한 불빛이 반짝였다. 마치 명멸하는 등불 같았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희미했던 빛은 점점 선명해지더니 이내 눈부심이 온통 저를 감싸며 확 덮친다. 태양처럼 강한 빛은 어둠속에서 영롱하게 빛나며 주변을 흩뿌려 댔다. 주자서는 저도 모르게 그만 팔을 들어 올려 눈을 가렸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하마터면 크게 육성을 지를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여긴 어디지? 어째 전혀 낯선 곳에 온 것 같은데.. 지금 자신에게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을 의문 투성이였다. 뒷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 거의 반사적 조건처럼 돌아섰을 때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는 듯한 검은 형체가 보였다.
02. Easy인가! Difficult인가!
일단 천천히 길 따라 걷기 시작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걷다 보니까 왠지 배고파진 기분이다. 확실히 객잔에서 뭘 제대로 챙겨 먹지 못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여분의 간식이라도 미리 준비해놓을 걸 싶은 후회가 밀려왔다. 손을 옷 안쪽 품 속 깊이 넣으니 무엇인가 사그락 잡힌다. 그것을 집어 꺼내자 노온이 만들어준 조그만 빵 몇 가지가 들어 있었다. 이걸 다행이라 생각해야 하나-
온전히 몸이 기운 차리려면 뭐라도 음식을 먹고 충전하여야 된다는 생각이 들어 빵 조각 하나를 모서리부터 조심스레 뜯어내 입 안에다 가져갔다. 음식을 보면 무의식적으로 떠올라 버리는 기억은 꽤나 고통이었고 상처였다. 그날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지, 만약 다른 최후를 맞이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결국 우리 모두에게 상처만 남아버린 결말은 폐해가 되어버렸다. 그래도, 그래도 주자서는 자신이 한때 천창의 수령이었다는 사실을 더 이상 거부하지 않았다. 좋았든 싫었든 제가 나아갈 운명이었을 테니까. 만일 다시 되돌아 가도 자신은 이 일을 선택할 것이다. 바보 같은 말이지만 어쩌면 정말 그럴 건지도 모른다.
사계산장 제자들의 미소를 보는 게 행복했었으니까 주자서는 무엇보다 사계산장의 장주라는 직위가 자랑스럽다고 생각해왔다. 그렇기에 아무리 괴롭고 힘들어도 지금 여기까지 버텨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건 역시 모두 지난 일에 불과한 것일까, 이젠 별 다른 감흥조차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되었다. 지금 가만히 생각해 보면 바보같은 짓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다 먹고 남은 천을 움켜쥔 손을 도로 주머니에 집어넣은 채 양손을 내린 주자서가 다시 거리를 걸었다.
한 순간의 찰나, 기우뚱 무게감이 느껴진다. 몸이 멋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싶더니 그만 중심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 눈을 뜬 그에게 가장 먼저 보인 장면은 어느 숙소 비슷한 공간이었다. 아늑한 침상과 이불이 펼쳐져 있었다. 오늘만 도대체 몇 번을 언급하는 건지 '여긴 어디지?' 같은 말을 되풀이만 하는듯 하다. 의문을 표하면서 일어나려는 도중 때마침 들어온 어떤 두 사람에 의해 제지되었다. 일어나려 노력할수록 자꾸 눕히는 바람에 주자서는 순간 또 짜증이 확 일었다.
"당신들 누구냐?"
"내 이름은 고상- 이쪽은.."
"조위녕이오"
"뭐라고?!"
순간 잘못 들었나 싶었다. 고개를 들어 그들을 바라보니 제가 알던 그 얼굴들이 맞다. 잠시만, 상황 파악이 안 된다. 아상과 조 공자라면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 너무나 잘 안다. 그렇다면 지금 자신은 다른 세계에 와 있다는 건가? 무슨 소릴! 말도 안 된다. 분명 여행길에서 어떤 숲을.. 가만 혹시 정말 막 다른 세상에 왔다라던가 뭐 그런 건가? 아, 몰라- 주자서는 인상을 썼다. 찡그린 미간이 살짝 좁혀지며 저지하듯 말을 꺼냈다.
"냅 둬"
"조금 전, 쓰러져 있는 걸 발견하고 대충 응급 처치는 해놨으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누워 계세요. 아마 피곤에 의한 과로인 것 같은데 아직 무리하지 마십시오"
"됐어"
주자서가 두 사람의 호의를 무시한 채 이불을 밀쳐냈다. 일어나려는데 정신이 아득해지는 아찔함을 느끼고 머리를 짚었다. 눈앞의 두 사람이 급히 팔을 붙잡아 말렸다.
"아직 무리하면 안 됩니다. 안정을 취하셔야 한다고요!"
"있죠- 뭐 하나만 물어볼께요. 당신, 지금쯤 다른 데 있던 거 아니었나요? 왜 이런 어두운 숲 속에서 발견된 거죠? 난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가 안 가는데?"
"조금 특이하긴 한데 나도 지금 믿을 수 없는 현실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 기괴한 숲에서 빛을 따라 왔더니 여기와 다른 세계로 온 모양인듯 하군"
"그렇군요. 솔직히 말하면 설득력 안 되거든요. 당최 다른 세계라는 것이 존재하기나 해요?"
"글쎄- 지금 내가 그 증거잖아"
"아직 몸이 완전히 낫지 않았잖아요? 무리하는 건 안 됩니다. 몸도 마음도 모두 건강해지고 난 다음이예요! 원래 살던 세계로 돌아가고 싶다면 적어도 지금은 얼른 누워서 안정을 취해주세요. 절대 안정입니다!"
어이가 없어 코웃음을 쳤다. 별 수 있나, 일단은 잠시 동안 안정을 되찾기로 하고 이어 침상에 누웠다. 그냥 단순히 일말의 변덕일 뿐이었다. 좀 많이 지쳐있을지도 모른다. 도저히 잠이 오지 않을듯 이상하게 돌아가던 하루를 뒤로 한 채 어느 새 스르륵 눈이 감겨왔다.
03. 점점 다가오는 Fantasy
맥이 일정하게 뛴다. 거칠었던 호흡도 어느 사이인가 가라앉았다. 불안감을 호소하며 두근거린 심장의 고동도 제자리를 찾았다. 가만히 아무 말 없이 손목의 맥을 짚어보던 의윈이 '으음- 이 정도면 별 탈은 없겠군~ 하지만 너무 무리하지 마시길'라는 말을 끝으로 진찰 도구를 천으로 감싸들었다. 이때 천창의 수하 하나가 상을 들고 의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슬슬 저녁 먹을 시간이 됐나 보다. 그러나 그는 별로 밥을 먹고 싶지 않았다.
슬그머니 의무실을 빠져나왔다. 주변이 매우 고요했다. 주자서의 저벅저벅 걷는 발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나는 이제 어떡 하면 좋지? 어떻게 하면 좋은가- 마음 속에서 수없이 많은 질문들을 던지며 마을 거리를 계속 걷는 대로 걷고 또 걸었다. 그 즈음, 중명원 안에서 진왕은 그가 없어진 사실을 알았다.
"어이- 주자서는 어디로 사라진 거냐! 아직 환자라고? 잘 감시하라 이르지 않았나"
"하지만.. 죄송합니다."
단붕거가 조금 불만 섞인 투로 뒤에 무어라 말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진왕은 그에게 '휴우- 됐다. 신속히 찾아와라'는 말을 마치곤 밖으로 나가버렸다. 단붕거는 괜히 턱을 쓸어내린 후 겉옷의 매무새를 만진 뒤 명령을 이행할 준비를 하러 나섰다.
한편, 주자서는 계속 마을 거리를 걷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마을에서 다소 동 떨어진 곳으로 향하기 시작했고 조금씩 해도 저물어가고 있었다. 고문당했던 아까 전에만 하더라도 그나마 붉은 빛의 노을이 있었지만 서서히 땅거미가 지더니 이젠 완전히 아예 숲 속에서 길을 헤메이게 되버렸다. 다행히 길가의, 아무렇게나 버려진 희미한 등불이 어떻게든 당장 눈 앞에 닥친 일시적인 일을 해결하여 주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근본적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었다.
날도 더욱 어두워지거니와 이곳과 다른 세계에서 온 주자서는 조금은 무섭다고, 낯선 곳에서 처음부터 길을 잃는 공포를 느끼게 되었다. '참 나, 왠만한 귀신 따위에도 겁이 난 적이 없단 말이지- 그런데 이런 내가 왜 이 따위 것에-!!' 뭔가 괜히 울컥 화가 난 주자서가 옆에 있는 나무에게 주먹을 세게 쾅, 내리쳤다. 아무 죄 없은 나무한테 애궃은 화풀이를 하던 그가 몇 번 나무를 노려 보다가 이윽고 다시 그리 밝지 않은 희미한 달빛 따라 숲을 걸었다.
조금 더 걷자 어떤 소리가 웅웅 울렸다. 본능적으로 경계 태세를 갖춘 채 자세히 들어 보니까 이건 사람의 목소리였다. 누군인지 확인하기 위해 가만히 귀를 기울어 소리를 들었다. 어랏? 왠지 익숙한 저 목소리. 오랫동안 잘 알고 있을 기시감이 느껴진다. 확인 차 한번 더 소리를 들었을 때 그것은 점점 선명해졌다. 가까이, 좀 더 가까이, 뚜렷하게 목소리의 형태가 나타나며 그것이 이제 제 근처까지 왔다는 걸 느꼈다. 아까보다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이윽고 곧 경계하였다. 은은한 불빛의 밝기가 강해짐에 따라 모습을 드러낸 제 앞의 사람을 본 주자서는 감탄을 감추지 못하고 아, 탄성을 질렀다.
이 세계의 나인가- 언젠가 만나리라 생각은 했으나 설마 이리 빨리 마주칠 줄 몰랐다. 달과 별조차 뜨지 않은 밤하늘처럼 진한 남색 장포를 걸친 모습은 정말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악의를 아우를 것만 같았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어 조금 멀리 떨어진 나와 나. 이 세계의 나는 아직 저를 알아보거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한 모양이다. 어쩌면 영원히 겹칠 리 없을 두 세계의 내가 나를 보는 기분은 어떠할까?
주자서는 그런 일을 일생을 살면서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지금 일어나는 일도 사실 꿈 같은 거라 반쯤 치부하고 있는 중이지만. 나머지 반 할은 나름 신비성이 있다고도 생각을 아주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애초에 물리적으로 초인적인 힘을 사용한다거나 무공을 사용하는 세계인 만큼 다른 세계라는 것이 있을 가능성도 분명 근거는 있다. 그리고 자신은 실제 다른 세계로 이동했다. 그것만으로 어느 정도 이 세상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할 신비함 천지라고 생각하였다.
부상이 심한 듯 한쪽 팔을 짚은 채 간신히 밭은 숨을 뱉어냈다. 잇달아 들려온 호흡의 간극은 거의 떨어져 있었고 여기저기 찢긴 옷 사이에 보이는 속살은 상처 가득 피투성이였으며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해 얼마 후 땅바닥 위에 풀썩 쓰러졌다. 비록 같은 얼굴을 한, 별개의 인물이라 하나, 주자서는 첫 인상부터 그에게 좋은 인식은 커녕 감정조차 가지지 않았다. 쌔액 쌕- 간간히 들린 풀벌레 소리와 섞여 불안정한 호흡이 뛰었다. 두 주먹을 꽉 쥔 주자서가 차차 알 수 없는 떨림을 느꼈다.
"살.. 려 줘..."
엄밀히 말하면 그는 매정하게 돌아섰다.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한 눈앞의 남자를 보고도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그대로 회피해버렸다. 이번에도 비겁하게 방관한 채 겁쟁이처럼 도망칠 뿐이다.
"난 나로서 있어야 할 권리를 찾아 여기까지 왔어~ 내가 어떻게 얻은 행복인데.. 겨우 손에 넣은 행복을 두 번 다신 잃고 싶지 않아! 이 세계는 나와 상관 없는 일이야"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구원의 손길. 어차피 다른 세계의 일이니 관여하고 싶진 않다. 천천히 한 발 한 발 뒷걸음치던 주자서가 완전히 몸을 돌려 뒤돌아 섰다. 애시당초 그럴 목적으로 온 것도 아니니까 내가 그를 구하지 않았다고 해서 죄책감 따윈 들지 않았다. 무정하게 숲길 따라 걸어가다가 자꾸 떠오른 생각에 또 다시 발걸음을 돌리고 만 주자서다. 일단 다른 것을 둘째 치더라도 남은 사람들이, 특히 이 세계의 온객행이 가장 슬퍼할 지도 모른단 것이 더 아른거렸다.
"이봐~ 당장 여길 빠져나간다. 날 붙잡아라"
"너는?"
"난 이 곳과 다른 세계에서 왔어"
"그래~ 정말 그런 게 존재 하는구나"
"도망쳐 나오는 길인가 보군~ 무슨 일인지는 가서 듣도록 하지~ 갈 만한 데는 있나?"
"사계산장인가.."
주자서는 그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얹은 뒤 부축했다. 절대 마음 약해지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결국 또 이렇게 되어버린다. 여전히 천창의 수령인 채였다면, 칠규삼추정을 행한 초반이었다면 아마 타인의 일에 감정적으로 나선다거나 죽이길 꺼려하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지금처럼 상대에게 적당히 개입하고 빠졌을 것임이 분명하다. 아무래도 또 다른 가능성의 세계에서 두 사람이 서로 만났다는 점에서 의의를 둬야 할 듯 싶었다.
그로부터 꽤 시간이 흘렀다. 이후 얼마나 잤는지도 모른다. 주자서가 천천히 눈을 떴다. 눈을 뜨니 왠 처음보는 낯선 천장이 보였다. 다시 눈을 감았다. 비몽사몽한 정신을 차린 후 천장을 바라봤을 땐 무언가 익숙한 것이 느껴졌다. 이미 여기가 어딘지 알았다. 사계산장 안이다. 그는 갑자기 휙, 몸을 일으켜 세웠다. 당연하게도 곁에는 어제 만난 나와 온객행이 지키고 있었다.
04. 승리의 조건
"일어났어? 어젯밤은 사과하지~ 그냥 기절시켜서 데려와서.. 정말로 미안-"
다른 세계에서 왔다던 주자서가 어제의 일에 대해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불현듯 생각 나 온객행의 얼굴을 쳐다보았으나 그는 미미한 웃음만을 지었다. 사건의 경위는 아직 모두 듣지 못했을 것이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말해주어야 할 텐데 어쩐지 그게 영 자신이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변명하는 것 같아서 쯧- 혀를 찼다. 조금 타격은 받았지만 일일이 해명하는 자신을 머릿 속에 그리자 그저 우스울 뿐, 품위가 나질 않아 그만두었다.
"그래도 일단 네가 아프지 않는게 먼저잖아?"
온객행이 예쁘게 웃었다. 이 놈의 미소는 참 언제나 반칙이란 말이지- 조위녕과 고상이 이들 옆에서 자잘한 심부름을 거들고 있는 중이었다.
"어이, 노온-"
"응? 무슨 일이야?"
"너, 나와 승부해라! 검 다룰 줄 알지? 네 녀석이 승부에서 이기면 난 아무것도 하지 않겠지만 대신 내가 이기면 어떤 일이든지 참견하지 마라"
"에..?!"
"아서- 무슨 말 하는 거야? 승부라니.. 그런 건 역시..."
폐병쟁이! 허구한 날 시비 걸 줄 밖에 모르냐며 고상이 삿대질을 하다가 조위녕에 의해 제지되었다. 씩씩대는 그녀를 애써 좋은 말로 달래며 조용히 타일렀다. 이 모든 원인은 진왕한테 있을 게 뻔한 걸 알면서도 현재 천하를 방랑 중인 주자서는 평행 세계의 나를 놓아줄 수 밖엔 없었다.
"됐어~ 이 일은 노온과 저 두 사람이 해결 해야 될 문제니까-"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 마음을 부딪히든 뭐든 그 둘의 싸움이야~ 자신이 옳다고 믿는 신념이라던가, 가치관 대립 같은 것은 항상 있는 법이지. 분명 이번에도 그렇다고 생각해- 그러면서 사람은 좀 더 성장해 나가는 거니까 이 방식의 전개도 마음을 부딪히기엔 결코 나쁘지 않다고 본다."
어쩔 수 없이 진왕에게 돌아가게 된 것은 맞지만 거기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까진 미처 알지 못한다. 도대체 알려주지도 않고 대뜸 밖으로 자신을 따라 나오라는 말엔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온객행은 어찌 해야 될까 생각하다가 결국 애칭이 아닌 주자서의 이름을 부르며 사계산장 뒷뜰을 향해 나섰다.
"자서! 자서!"
헉헉, 숨이 찬다. 온객행이 거친 호흡을 내뱉었다. 식물들이 만발한 사계산장의 뒷뜰로 나온 온객행과 주자서는 서로 일정 거리가 떨어진 간격을 둔 채 마주보았다. 오늘 날씨는 분위기라도 돋우어 주려는지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그들의 머리칼과 옷자락이 흩날렸다. '솔직하지 못해선..' 온객행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바람 때문에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휘날린 모습은 더욱 더 의문만 증폭시켰다.
몇 가지의 질문을 던진 것도 무안하게 그 어떤 물음에도 답하지 않은 채 노려보았다. 바보- 좀 솔직하게 말해주면 되건만 아직도 날 믿지 못하는 걸까.. 물론 그 생각 마저 금방 백의검을 끄집어낸 녀석에 의해 오래 지속되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 역시 칼집에서 검을 빼어들었다. 스릉, 이명을 찢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쇳덩어리가 부딪히는 감각은 오랜만이었다. 그 느낌에 픽 웃었다. 익숙한 그립감. 백의검을 잡을 때의 행동과 특유의 버릇, 그리고 자세는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자연스레 실행에 옮겨버리는 것을 혐오하면서 받아들일 수 밖엔 할 수가 없는 자신에게 강한 괴리감을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개의 독이 든 못을 박아 넣은 주제에 서서히 오감과 무공을 잃어감에도 예리한 날붙이를 휘두르던 이전의 감각은 아직 살아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주자서는 사계산장의 사람이 아닌 일개 천창의 수령일 뿐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 서로 맞닿은 금속이 이리저리 호쾌하게 공중에서 분해되었다. 한참을 마음을 부딪히며 아무 말 없이 눈빛으로 싸우던 중 온객행이 먼저 입을 열었다.
"대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검과 검끼리 다시 챙, 거리면서 한번 맞부딫혔다. 순간적인 검광이 일었다가 사그라졌다. 이어 그가 뒷말을 덧붙이면서 크게 소리쳤다.
"이런다고 현실이 달라져? 왜 솔직하지 못한 건데! 이번에도 견딜 수 없다며, 괴롭다며 도망칠 생각인가? 언제까지 계속 피할 순 없잖아! 난 악몽 같은 운명 속에서 널 만나고 달라졌어~ 진심으로 변할 수 있었어! 그런데.. 그런데.. 넌 어째서 소중한 사람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는 거냐고-!!"
"하아? 뭐라고? 말도 안 되는 헛소리하지 마라! 소중한 사람 따위 내 알 바냐! 흥미 없군- 내가 왜 그래야만 하는 거지? 그러는 네 녀석은 뭐가 그렇게나 두려워서 여유가 없는 거냐? 최악이군~ 복수에 미쳐서 환장해 날뛰지 마라~ 꼴 사납다."
"뭐?"
"네 녀석이 정 그렇게 사람을 돕고 싶으면 귀곡의 귀신들을 모아서 정의 놀이라도 하지 그래? 흥- 정말이지, 뭐가 자기 분수인지조차 모르는 주제에 실격이다!"
"그러는 너야말로 생명 개념도 모르면서 그쪽도 인간으로선 실격 아닌가?"
시종일관 코웃음을 치며 말하던 주자서가 잠시 멈췄다. 이내 팔을 내린 뒤 검을 거두었다.
"실격이라.. 훗, 그럴 지도-"
"무슨 뜻이지?"
"뭐, 오늘은 이쯤 해두지~ 하지만 다음 번에 만나면 그때 승부의 끝을 낼 테니 그리 알아~ 난 너완 달리 시간이 없거든~ 그러니까 방해 하지 말고 꺼져"
05. 목숨을 거는 의미
아마 무의식적이었던 것 같다. 반사적으로 뒤돌아 선 주자서가 온객행에게 달려가 상태를 살핀 것은 말이다. '어이, 괜찮나? 이봐-' 그가 온객행을 조심스레 눕혔다. 적당히 손을 봐 줄 생각이었는데 직접 몸을 들이받았으니 본인이 자처한 일이다. 살며시 손을 짚자 어느 부위에서 가장 크게 다쳤는지 모를 붉은 피가 흥건히 묻어나옴과 동시에 크윽, 각혈을 한 채 고통을 호소하면서 신음을 뱉었다. 혹시나 싶어 한번 더 짚었던 부위를 누르니 역시나 괴로워 하였다.
오른쪽 아랫 복부에서 강하게 통증을 느끼는듯 했다. 그쪽으로 정말 검을 찔렀으니까 그럴 만도 했다. 사람을 부르려 소리치기 직전, 현황을 기다리고 있던 칠야와 대무가 이들을 발견하고 쓰러진 온객행을 받아 부축했다. 대무가 무어라 한 마디 꺼내려고 했으나 내게 아무것도 묻지 말라는 눈빛을 하는 주자서를 그냥 내버려 두었다. 지금은 목숨이 위험할 정도로 큰 수술을 감행해야 할 부분이 급선무이기에──
사계산장 안에 마련된 의무실은 금방 팽팽하고 무거운 공기가 감돌았다. 그 밖에 다른 의원 및 보호자들은 포함한 모두가 불안 초조해 하며 기다린 끝에 장장 두 시진 만에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다. 연신 불안에 떨며 조위녕의 팔소매를 꼭 쥔 고상이 드디어 결과를 들을 수 있었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정말인가요? 감사합니다."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하니 너무 무리하지 않도록 주의 부탁하오"
"네!"
칠야는 눈동자를 굴려 멀찍히 떨어져 문에 기댄 주자서를 조용히 주시하였다. 내가 알던 그는 분명 이런 사람이 아니었을 텐데. 이렇게까지나 차가운 녀석이었던가? 어릴 때부터 계속 봐온 친구 따위 같은 것은 이제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다. 강산도 10년이면 천하가 변하는 법인데 사람이 항상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가장 잘 알면서 그런 친구의 존재를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야 하나 망설임이 일었다.
이미 깨어 있던 온객행은 눈을 떴다가 다시 감았다. 여기저기 주변에는 나락이 도사리고 어둠이 만연한 곳, 매일 이런 위험천만한 일상들이 가득 있기만 하는 무의미한 세계에서 진정 살아갈 의미를, 가치를 찾을 수나 있는 걸까? 조금은 그가 이해될 것 같기도 하고 안 될 것 같기도 했다. 도대체 무엇이 진심인지 아직 헷갈린다. 하지만 딱 한 가지, 오직 단 하나만은 알 수 있었다. 겉으론 말은 거칠게 해도 사실 굉장히 상냥한 사람이라고 생각되었다. 조금 더 주자서와 이야기 해 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그에게 묻고 싶다. 정말 지금까지 우리들이 보냈던 시간들은 전부 헛된 거였냐고─
주자서는 꿀꺽 마른 침을 삼켰다.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다 도망치듯 자리를 떠나려던 찰나, 이세계의 주자서가 코웃음을 친 채 말했다. '그렇군~ 넌 진실을 말하고 있지 않아' 그 말에 평행 세계의 그는 시선을 돌렸다. 나도 한땐 거짓말로 자신을 감싸며 보호하고 온갖 변명들을 들어가면서 과거를 마주하지 않으려 하던 모습. 그는 알고 있었다. 공감한다. 지금이라면, 이 세계라면 무언가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지 않을까.
"저기- 잠깐만! 다른 세계의 자서, 물어볼 게 있어"
"뭐냐?"
"있잖아.. 네가 있던 세계에선 어땠는진 몰라~ 여긴 정말 꿈도 희망도 없는 세계니까.. 허나, 그쪽의 나는 절대 나쁘다고 생각 안 들어"
"하나만 묻지~ 이 세계의 진구소도 죽었나?"
무척 괴로운 표정을 지어보인다.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군. 이해했다. 그것으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완벽하게 파악 가능했다.
"즉, 구소의 죽음을 이용하여 협박 당했다, 이거군~ 노온을, 온객행을 없애라 지시한 명령도 최대한 이반한 거고- 아닌가?"
"나도 그런 짓 하기 싫었어! 하지만.."
"너, 바보냐!"
주자서는 그의 멱살을 잡았다. 겨우 이깟 일로 넌 또 다시 소중한 사람한테 상처 주고 만 거야.. 정곡을 찌른다. 평행 세계의 너는 할 말이 없었다. 입술을 잘근 깨물어 씹으면서 무능함으로 점철된 분함을 토해냈다. 이렇게 똑바로 이유없는 악의에 맞서 그릇된 정의를 향해 분노를 자아내는 것도 실로 오랜만이다.
"과거의 과오를 되풀이 할 셈이냐"
"그러니까 알려줘! 네가 그렇게까지 목숨 거는 의미는 뭐야?!"
"목숨을 거는 의미인가.."
침묵을 지킨 채 한번 뜸 들였다. 그의 머릿 속에 잠시 기억을 떠올리며 회상했다. 전부, 모든 것이 내 잘못인 것만 같았기에, 천창의 활동을 더 이어나갈 수 없었다. 삶과 죽음에 대한 회의를 느꼈고 칠규삼추정을 행한 뒤 천창을 떠났으며 이후 온객행과의 만남. 그리고 새로운 운명 속에 다시 발을 들이밀었다.
그 일련의 사건들이 지나고 난 후 살아갈 의미와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그 내가 나로서 있을 자유를 찾았음에도 여전히 마음의 상처와 후유증은 쉽사리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을 상처가 되어 남았다.
"얼마나 열심히 뛰어 다녀도 말이지- 전부 헛 일이다. 죽으면.. 모두 죽으면 끝이거든~ 인간의 목숨은 하나 뿐이라 소설처럼 두 번 다시 생명을 연장할 수 없어! 구해내지도 못하고 소중한 누군가가 직접 눈 앞에서 잃는 모습, 그 슬픔과 괴로움, 넌 이미 알고 있을 텐데?!"
"어~ 확실히.. 누군가를 구하지 못한 죄책감은 아주 잘 알아"
"흥- 목숨을 거는 의미는 겨우 그 정도로 단순한 이유가 될 수 없다. 네 녀석은 정말 목숨을 거는 의미를 몰라~ ..... 해주지! 우리가 서로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는 점이 이용할 가치가 있을지도 모르지~ 그러니 이 내가 해주겠단 거다. 너 대신-"
이 말을 끝으로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제 갈 길을 걸어갔다. 평행 세계의 주자서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그의 뒷모습이 완전히 자신의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한참 응시하였다. 이윽고 서서히 주자서의 몸이 떨렸다. 분노일까, 아니면 그날의 사건이 떠올라 생긴 죄책감인 걸까, 무슨 감정인지 알 수 없었으나 그저 주먹을 세게 꽉 쥐었다.
06. 맞춰져 가는 Puzzle
누군가의 미소를 지키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모두 같은 잘못을 반복하게 된다.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 용서 받기 위해 눈물 흘리며 상처 입고 상처 받으면서 이 얼마나 많은 거짓말과 기만인가! 깨닫기 전에는 알지 못한다.
사람은 무언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뒤 후회하고 나서야 다시금 깨닫게 되는 법이다. 그러니까 나는 이 세계의 그릇됨과 싸워나가기 위해서 살아갈 것이다. 그것이 나의 속죄이겠지. 주자서는 더 이상 현실을 외면하지 않기로 했다. 똑바로 마주하겠다고- 몇 번이나, 몇 번이나 결의를 다진다.
평행 세계의 주자서가 가장 먼저 할 일은 동료들을 모으는 것이다. 금방 사계산장 안은 이번 계획을 함께할 동료가 하나 둘씩 모여 들었다. 잘못에 대한 사과를 하기엔 용서 받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잠시 미뤄두기로 하였다. 다른 쪽의 나라면 그가 벌일 작전은 하나, 평행 세계의 주자서 대신 자신이 미끼가 될 목적으로 지금쯤 움직이고 있을 테지. 저 혼자만 가만히 있을 수 없어 곧 실행에 옮길 작전 회의가 열렸다.
"어떻게 할 거지?"
"평행 세계 주자서의 정체는 우리 밖에 아무도 몰라~ 괜히 들키면 입장만 곤란해"
"그러니까 지금 작전을 세우자는 거 아닌가? 칠야-"
"하면 이제 어떡하면 좋겠소? 최대한 방법이라도 찾아야 되지 않겠나?"
"대무의 말도 옳아~ 빨리 방법을 찾는 게 우선이야~ 그 전에 성령은?"
"아상, 그냥 진실을 말하는 게.."
"아, 나라고 별 수 있어요! 그래요. 말 할께요. 말한다구- 성령은 지금 귀곡에 갔어요. 조경이 오호맹을 이끌고 청애산에 쳐들어와 난장판을 부린다는 소식 듣고 당신 때문에 성령이 나선 거예요! 그래서 주인님까지 위협 무릅쓰고 간 거라구요! 그 자의 목적은 장성령의 말살~ 그걸로 귀곡주를 꾀어낼 셈인 거고.. 뻔히 함정인 거 알면서!"
"아상- 진정하시오!"
"그렇지~ 타인의 목숨을 빌미 잡아 조금 협박당한 갖고 우리 주인님을 죽이려 들었어! 이 폐병쟁이! 폐병쟁이 주제에!!"
"아상! 아상-!!"
"...... 왜 방해하는 거야!"
고상이 울음을 터뜨렸다. 최대한 기색을 지우는 척 하는 것도 슬슬 한계였다. 마침내 실토하고 만 그녀가 감정이 고조되어 격해져 아무렇게나 하고 싶은 말을 던져댔다. 흥분해 날뛰는 고상을 조위녕이 진정 시키려 좋게 타일러 보지만 헛수고였다. 아직 사과조차 하지 못했는데 꾹 억눌린 감정이 한꺼번에 터져나오면서 주자서가 크게 소리친 후 그제서야 아이처럼 소리 내어 울던 고상의 울음이 잦아들었다.
"알겠다. 내가 귀곡으로 가지"
"뭐라고?!"
"무리다. 귀곡 주변은 음기가 매우 강해 아직 칠규삼추정의 고통에 지배받고 있는 몸 상태론 오히려 상황만 더 악화시킬 수도 있어"
"그럼 나더러 어쩌란 거냐! ..... 내가 할 수 밖에..!!"
탁상 위를 쾅, 하고 주먹으로 내리친 주자서가 한층 격양된 목소리를 내뱉었다. 후회할 짓을 만회하기엔 너무 멀리 돌아온 것 같다. 설마 했던 것은 역시 예상대로였다. 아니, 아주 예상치 못했던 부분도 있긴 했었는데 우리는 그 녀석을 다소 꽤 과대 평가한 모양이다. 대무가 그를 붙잡아 만류하였으나 주자서는 반드시 자신이 어떻게든 해야만 한다는 책임과 사명감 때문에 대무의 팔을 뿌리친 뒤 귀곡으로 향했다.
이들이 의미 없는 탁상공론을 펼치고 있을 무렵, 한편 이세계의 주자서가 제일 먼저 수행한 것은 진왕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런 다음 오호맹을 끌어들여 화려하게 이중 작전을 펼치는 것이었다. 미끼가 될 수 있으면 뭐든지 이용한다. 천창에서 활동하던 시절엔 항상 그래왔었다. 하지만 이번에야말로 올바르게 활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 비열함과 잔혹성이 아닌 좀 더 자신이 믿는 신념을 관철해서- 지금의 나라면..
"여기가 귀곡.."
"어서 와라~ 환영하지! 성령-"
"뭘 하려는 거죠?"
"넌 온 곡주를 유인할 도구다. 그를 구하겠다면 나를 쓰러뜨려야 할 것이다. 아니, 넘어야 할 산이 많겠군~ 내가 아니라 갈왕을 먼저 공략해야 될 테니-"
"......"
"무엇을 주저 하나- 싸움은 이미 시작됐어"
"...... 좋아~ 어디 한번 해주겠어!"
침을 삼켰다. 목이 타 들어가는 갈증이 느껴진다. 물끄러미 제 검을 바라보던 장성령이 느릿핫 움직임으로 검을 들었다. 할 수 있다면.. 할 수만 있다면..
"정말 난 그렇게 가르친 기억이 없었던 것 같은데?"
"사부!"
"생각해 보면 제대로 널 마주하지 못했던 같다. 난 할 수 없다고- 주위에 책임 전가한 채.. 어떤 일이 있어도 내 제자라는 건 변함 없어~ 끝은 내가 하지"
07. 컨티뉴의 너머
백의검의 날을 쭈욱 훑었다. 손가락과 손바닥을 맞대니 흠칫 차가움이 서린다. 검이여, 마음이여- 너는 알고 있을까. 이 칼날 끝이 어디로 향하는지.. 무엇을 위해 나아가면 좋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이 칼날 끝이 향하는 곳에 네가 있다면.. 네가 봐준다면 분명──
꿈, 꿈이라.. 알고 있는 척, 못 본 척, 오랜간만에 담아보는 단어다. 주자서는 꿈에 대해서 제대로 된 정확한 정의가 어떤 것인지 또는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처음 시작은 나름 꿈이 있었다. 큰 포부도 있었고 열정을 펼칠 의향도 있었다. 순전히 구소의 죽음은 그저 결단을 내릴,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 작은 동기 부여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사건이 모든 것을 초래하였으며 자신이 건 꿈과 인생이 깃든 모든 것을 망친 채 빼앗아간 주범이나 다름 없다.
이전부터 계속 품어버린 의문은 회의감만 가득 찬 채 마침내 보이지 않는 족쇄를 채워 자책했다. 꿈을 꿀 자격 따윈 없다고 생각했다. 포기하고 좌절하며 도망친 주자서는 꿈을 놓았다. 이 세계의 희망이 없는 절망은 절대 존재해선 안 된다. 그렇게 완전히 없애버려야만 하는 적으로 인식되고 낙인 찍혀버렸다.
실타래처럼 얽힌 대격전이 벌어졌다. 선과 악, 빛과 어둠, 겉과 속의 이면, 동전의 앞면과 뒷면, 진실과 거짓, 긍정과 부정, 희망과 절망 등, 전부 두 가지를 나누어 구분 짓는 게 정말 무엇이 옳고 그른지 확연하게 정의를 내릴 수 없었다.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주자서가 검을 들었다. 이리저리 공격을 받아내는 칼끼리 서로 부딪혀 날카로운 비명을 자아냈다. 여기서 이렇게 허무이 끝낼 수 없다. 기세에 몰아부친 것도 잠시, 초반부 동등한 위치였건만 어느덧 조금씩 그가 점점 밀려나기 시작하였다.
밀려나고 밀려나 저만치 나가 굴렀다. 그렇지 않아도 귀곡 특유의 음기와 살기가 매우 강해 제대로 숨 쉬기 어려웠다. 기력은 떨어지고 일어설 힘도 소진되어 여기까지 숨이 붙어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점점 검의 감각 마저 잃어간다. 이것은 촉각인가.. 아니면 오랫동안 익숙하게 해온 버릇과 습관 무엇가의 본능인 건가- 도대체 어떤 그립감이었는지 기억조차 가물하여 잠식되어 갈 때 즈음,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는 점차 선명해져 귓가에 뚜렷이 들려와 멈춰섰다.
"바보- 몸도 성하지 않은 주제에 왜 무리하는 거야"
"노온! 모두.."
"힘들 때 서로 돕는 게 친구 아닌가"
"이래서 다른 사람의 충고를 무시하면 안 된다니까- 다 죽어가잖아"
"흥- 죽어가라지 뭐~ 자기가 자처한 일이다. 헌데 어째서 우리가 나서지 않으면 안 되는 거냐"
"엽 선배, 그렇게까지 말씀하실 필요는.."
"틀린 말 했냐? 너도 누굴 가르칠 만한 실력은 못 되는데 말이지~ 네 제자 놈들을 이끌 생각이라면 제발 너부터 정신적 성장을 이루는 건 어때?!"
"...... 노온, 미안해- 용서받지 못할 걸 알지만.."
"됐어~ 설마 내가 겨우 그거 하나 갖고 화낼 사람으로 보여? 진작 신경도 안 썼는 걸"
"정말 미안했다. 감사를 표하지"
"이제 결착을 낼 때야"
백의검을 포함한 모든 검들이 일제히 일렬로 선 모양이 되었다. 검 대신 부채를 든 온객행의 손이 딱히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이후 사건이 무사히 끝났다. 길고 긴 여정이 드디어 막을 내리는 순간이다. 이제 이 세계도 작별을 고해야 될 때다. 이세계의 주자서는 아직도 꿈꾸는 것 같았다. 깨어나면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현실인데 우리들은 한바탕 무엇을 위해서 싸웠던 걸까? 저마다 가진 소원과 야망. 기억을 덧그릴수록 덧없다는 걸 깨달았다.
"고마워- 네가 일깨워 준 거야~ 난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아"
"딱히 내가 한 것은 없어"
"다른 세계의 나, 네가 있던 세계는 어때?"
"오- 그건 나도 궁금해~ 그쪽의 아서가 있는 세계에도 내가 있다는 거잖아!"
"사부, 이야기 해주세요."
"하여튼 전부 다 바보들 뿐이군"
"저 영감탱이가 또 태클이냐고-"
"시끄러워! 말이나 못하면 가만히 닥치고 있어라"
"왜 맨날 나만 갖고 그러는 건데요!"
"...... 내 세계는 오랜 숙원을 끝맺었다. 여기완 다른 사건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각자의 방법으로 구원받았다고 생각해"
"그럼 다행이군"
"돌아가면 그쪽 세계의 노온과 동료들에게 안부 부탁해~ 이런 세계도 있었다고 말이야"
"응~ 분명 놀라겠지"
이 세계의 주자서는 여기서 일행과 짧은, 조금의 긴 인사를 나누며 이별했다. 아쉽지만 또 다음을 기약해야겠지. 마지막인 만큼 손을 뻗어 악수를 청하려다 말았다. 어차피 자신이 있을 곳도 아니고 이쪽은 평행 세계의 내가 존재하는 세계니까.. 앞으로 일어날 일들은 그들에게 맡기면 되니까- 더 이상 부정하진 않겠지만 어떤 긍정도 하지 않은 채 옅은 미소만 띄웠다.
가만히 원래 세계의 온객행을 떠올렸다. 지금쯤 그 녀석도 천하를 떠돌아 여행하고 있을 터다. 여행 중 무슨 일이 있었을지 궁금하다. 어서 돌아가 다른 세계에서 있었던 시간들을 알려주고 싶었다. 객잔에 들어가서 자리 잡고 앉아 각자 술을 마시며 그런 이야기를 떠들어 대고 싶은 마음이다. 아직 헤쳐나갈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뭐, 그래도 이제 괜찮지 않을까?
기묘한 숲은 여전히 기괴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번 사건에 휘말리게 된 모든 일의 시작이었던 곳이다. 어쩌다 자신을 이곳으로 이끌었는지 저 하늘은 알고 있을까. 분명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나에게 한번 더 운명을 바꿀 기회를 준 것일지도 모른다고, 지금은 그리 여길 뿐이다. 주자서는 정말 오랜만에 퍽 상쾌한 웃음을 지었다. 한결 가벼운 발걸음으로 길을 따라 걸으니 주변의 시끄러운 사위가 고요해지며 일순간 영롱한 빛이 일었다.
출처 모를 숲의 빛이 인도하는 대로 걸어나오자 어느 새 깊은 눈동자 안에 비친 풍경이 바뀌어져 있다는 걸 직감했다. 분명 다른 세계와 같은 경치였지만 확연히 원래 세계로 되돌아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연은 우연으로 이어져 필연으로 또 다시 엮인다고 하더니 공교롭게도 눈앞에 마주친 사람은 온객행이었다. 이미 저 멀리서부터 저를 알아보고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며 다가온듯 하였다.
"여어, 아서- 여기서 다 보네"
"노온-"
"여행은?"
"나쁘지 않았어"
"돌아가자~ 가서 그동안 천하를 떠돌아 다니며 있었던 일들 이야기 해 줘"
"응~ 기대해도 좋을 거야"
누군가가 내 눈 앞에서 잃는 건 싫다. 더는 사양이다. 그렇기에 나는 변했고 오늘 하루도 웃을 수 있도록 저편을 향해 나아가고 싶다. 그것이 지금은 나의 새로운 꿈이 되었다. 분명 손을 뻗은 것이 설령 전부 닿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 하고 싶어! 아무것도 하지 않고 후회하는 것보단 나으니까, 반드시 어디까지라도 상냥하게 손을 내미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주먹을 쥔 채 다짐해 본다.
지금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건 어쩌면 우리들이 만난 기적이 아닐까 싶다. 인생이란 하나의 거대한 공간이 펼쳐진 끝없는 경험 속에서 다시 한번 운명을 선택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말이다. 몇 번이나 바라니까, 내가 구원 받은 것은 함께 웃고 울어주는 감정을 공유하며 모두가 곁에 있어 주었으니까 이렇게 힘낼 수 있었다. 언젠가 이 빛 속에서 또 다른 누군가가 잇길, 생명의 감각의 너머 너와의 온도 거리까지 나는 절망 대신 조금 희망이란 이름의 마법을 걸어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