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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편 이전의 주자서 중심
* 산하령 기반, 원작 설정이 조금씩 있음~ 주자서에 대한 주관적인 캐해석+동인 설정이 포함된 날조
* 살짝 중2병스러움.... 주자서 Got it move!
언젠가부터 주자서는 거의 술을 마시지 않았다. 굳이 어느 쪽의 취향이냐 말하자면 개인적인 취향으론 술을 좋아하는 것에 선호하긴 했지만 사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감정에 지배된 존재감은 매우 옅어서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선호도를 따지면 오히려 좋아하는 기호에 가깝다. 그런데도 근래 들어 요 몇 년 간 주자서는 사사로운 감정을 모두 지우고 덜어낸 금욕 생활을 하였다.
어쩌다 한번 특별히 연회가 있는 날이라던가 할 땐 혼자 적당히 앉아 있다가 간단한 인사치레만 뒤 빠져나오는 식이었으며 오래 머물러 있는 것은 별로 원하지 않는 일이다. 이 밖에도 더 불호하는 것 중, 그는 욕실에서 목욕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옷을 벗으면 몸의 곳곳에 아로새겨진 자신의 흉터가 너무 잘 보여 가리고 싶을 만큼..
대체적으로 천창의 수령으로서 활동을 할 땐 대부분 검은색 등의 진한 옷을 입는단 정도로 그나마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상처를 감추기에도 딱 적당했고 붉은 피가 묻어도 그 색을 먹어 치워버린 검은색이란 색깔에 감사를 표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주자서의 취향도 자연스레 변해 환경에 적응해 나갔다. 예전엔 밝은 색 계열을 선호한 적 있었으나 지금은 아니다. 주변의 환경이 점점 사람을 비인간적인 존재처럼 만들어 놓았다.
어쩔 수 없이 몸을 씼어야 했기 때문에 겉옷을 벗었다. 천천히 하나씩 여민 옷가지를 완전히 풀어낸 주자서가 커다란 둥근 원형의 욕조에 몸을 담았다. 출렁, 무게에 의한 물살이 일었다. 얼마 전 전투로 인하여 크게 부상을 입은 상처의 흉터가 아직 사라지지 않고 남았다. 주자서는 이런 자신의 몸을 혐오했다. 치료를 몇 번 했음을 간과하지 않은 자국이 보기 싫은 나머지 주먹을 세게 내리쳤으나 괜히 제 얼굴에 물이 튀길 뿐이다.
억지로 든 바가지에다 넘치지 않게 약간 채워 어깨부터 물을 들이붓자 상흔이 닿는 순간 정신이 아찔함을 느꼈다. 마치 보글보글 끓는 듯한 따가움이 서린다.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주자서는 큭, 터져 나온 신음을 흘리면서 손을 들어 상처를 감싸 쥔 채 푹 고개를 숙였다.
"이깟 고통쯤, 앞으로 짊어질 죄에 비하면.."
대충 씻고 나온 후 한쪽에 가지런히 정리된 옷을 펼쳐 입었다. 흉터가 보이지 않자 이제야 마음이 놓였다. 서재 안을 들어선 것도 잠시, 부하 한 명이 다가와 진왕이 뵙길 청한다는 말을 전하고 나갔다. 오늘 업무 보고는 전부 끝났을 텐데.
진왕이 친절하게 나를 보잔 이유라면 하나 밖에 없겠지. 잘하고 있냐는 감시. 감히 딴 마음 품지 못하도록 자신을 매여놓고 싶은 것임이 분명하다. 옷 매무새를 다시 정리한 다음 찾아간 진왕 앞에서 주자서는 두 손을 모아 공수하는 것을 통해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었다.
"무슨 일이죠? 오늘 보고는 드렸을 텐데 절 보자고 한 이유는?"
"우리 사이에 꼭 무슨 일이 있어야만 하나?"
"필요 없는 부름은 바라지 않습니다. 그래서 용건은 뭡니까?"
"자서, 들었다. 이번 활약도 완벽했다더구나"
"항상 완벽하게 빈틈없이 행동하라고 지시한 건 당신이잖아요."
진왕의 직속기관 현 천창의 수령. 잔혹하고 무자비한 살수 조직. 이전이라면 그리 의문을 품지 않았을 것이다. 이 즈음 주자서는 회의를 느꼈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자신이 어떤 방향을 향해 나아가야 할지 몰라 깊은 고민에 빠졌다.
어느 순간 이 일을 할수록 점점 회의감을 느껴버린 후부터 확실히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눈을 내리깔고 바닥을 바라본 채 혼자 내적 갈등만 내내 하고 있을 무렵, 진왕이 다시 말을 걸어왔다.
"요즘 천창의 기강이 꽤 헤이해진 모양이군~ 이런 늦은 시간까지 뭘 하고 돌아다니는 거지?"
"특별 강화 훈련을 했습니다. 천창의 명예에 흠집이 나면 안 되니까요."
"예전보다 감각이 많이 무뎌진 것 같은데? 그땐 좀 더 살기의 눈빛으로 가득 찼지"
"감각인가.."
거짓말-
거짓말이다. 주자서는 본인의 실력에 대하여 특별 강화 훈련을 한 적 없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그를 속이고 있는 중이다.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거짓말 치는 것은 아무런 죄책감이 없었다. 저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또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무표정과 함께 왜곡이 튀어나왔다. 사실 몇 십 년간 봐왔는데 조금만 알아 보면 바로 들킬 내용을 모를 리 만무하다. 아니면 일부러 반응을 떠보려는 건가. 진왕이 정말 자신의 이런 허술한 거짓말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경 쓰지 않고 대화를 이었다.
"알고 있지? 자서- 넌 지금 해야 할 일, 생각할 일, 모두 정해져 있다. 내 심복으로서, 내 오른팔로서도.."
"물론입니다."
"그럼 쓸데없는 일 따위 휘둘리지 말고 집중해라~ 인생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전부 잘라내 버려"
"알고 있어요. 내 인생은 불필요함 투성이니까-"
답은 언제나 정해져 있다. 그걸 대체 왜 물어보는 거야? 같은 말이 목에 차올랐으나 속으로 삼켰다. 늘 그랬듯 애써 사람 좋은 척 행동하였다. 앞에서 뭐라 반항하지 못할 노릇이다. 반항하면 오직 죽음 뿐.. 그는 뛰어난 머리를 가졌기에 분위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상황 판단을 읽어낼 수 있을 만큼 두뇌 회전이 빨랐다.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굳이 제 진심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고 방해받고 싶을 마음 따윈 없다. 아무도 이해해 주지 않아도 괜찮아. 행실 바른 사람은 무엇이든 완벽하게 있어야 하는 법이니까──
주자서가 인사를 한 뒤 밖을 빠져 나왔다. 그의 집무실을 향해 진왕에게 경멸을 보냈다. 내 인생을 망친 사람. 자유로워 싶어- 변하고 싶어- 오늘따라 유난히 자유에 대한 갈망이 더욱 커졌다. 강자의 권위로 누군가의 자유를 빼앗고 구속당했던 인생은 그만 여기서 끝내버리고 싶다가도 천창과 사계산장의 남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또 다시 그러지 못한 채 생각의 연속을 반복하고 만다.
하늘 너머 응시한 미래가 불안정하게 흔들린다. 과연 정말 이대로 좋은 것인가. 이제 삶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어차피 살아갈 의미조차 찾지 못했으니 그저 현실을 회피하고 시선을 돌리면 차라리 편할지도 모를거란 생각이 들었다. 주자서는 처음 가장 나답지 않은 일을 행하기를 마음 먹었다. 주먹을 꽉 쥔 채 결의를 다졌다. 언젠가 꿈꿨던 이상을 손에 넣기 위해서 지금 할 수 있을 만할 계획을 직접 실행할 심산이었다.
거리를 걷자 늦은 밤에도 간간히 사람들이 보였다. 돈 한 푼 달라 구걸하는 거지. 술을 마시자고 권유하는 일부 취객들. 그리고 주변을 더 둘러보니까 저 멀리 빈 공터에서 청년처럼 보이는 듯한 몇몇 사람들이 공연 연습을 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평소엔 별로 상관하지 않고 지나쳤을─ 무대 준비로 한창 바쁠 터인 그들을 보러 성큼 발걸음을 뗐다. 구성원 중 한손은 부채를 든 일원 하나가 가까이 다가와 저에게 홍보성이 담긴 이야기를 건넸다. 낯선 청년은 살가운 함박웃음을 지어보였다.
"저, 형씨- 이번에 저희 공연하는데 보러 와주시지 않을래요?"
"공연?"
"네~ 저희 지금 밤낮 없이 정말 열심히 준비하고 있거든요."
"시간 나면 보러 가지"
일원 중 다른 한 명이 어서 오라 손짓하자 청년은 '꼭 기다릴께요!'라는 짧은 문장을 남긴 후 뛰어갔다. 한동안 유심히 연습 과정을 살펴 보건대, 한창 나잇대의 젊은 청년들은 저마다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분명 연습이 힘들어 지치고 힘들 텐데 그 자리에 모인 어느 누구 하나 불평 불만을 토로하는 이가 없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앞에 놓여진 물병이 무색할 정도로....
필시 저 청년들은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할 테지. 천창의 존재는 직속 기관 내 함께 일하는 주변 동료들만 알기에 극소수만이 아는, 극비였다. 물론 자신이 천창을 이끈 수령이라는 진실 마저 절대 모른다. 주자서는 배신자를 철저히 처단할 만큼 인간의 생명이 가진 존엄성을 무시했으며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죽일, 잔혹하고 냉정한 자였다.
그는 지금껏 감정을 지우고 살았다. 순수의 가면을 쓴 채 어떤 더러움이든 마다 하지 않는 인물. 타인의 희생을 당연시 해온 인물. 그게 주자서다. 무언가를 쫓아 새로이 시작하기 위한 시작 이전의 장면은 모든 것이 허무해져 결코 감출 길 없어 씁씁하게 웃었다. 주자서는 공허하게 울린 시끄러운 소리를 지나쳐 다시 길을 걸었다. 곧 하나 둘 보러올 관객들한테 조금이라도 더 멋진 공연을 보여주고 싶어 흐른 땀 방울을 닦아가며 매진하는 활기는 주자서와 다른 세계에 속해 있었다. 그리고 주자서는 깨달았다. 이 세계는, 이 거리는 제가 없어도 잘 돌아가는듯 하다는 것을..
마치 처음부터 내가 없는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그런 기분이 오래 겹쳐 쌓일수록 괴로워질 뿐, 고명한 의지를 전부 담아낼 수 없음을 한탄하였다. 시간은 야박하고 죽음은 무정했다. 주자서는 비정해질 수 밖에 하지 못했던 지난날을 후회했으나 너무 늦어버린 시간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음을 자각했다. 결국 이상이 아닌 현실에서 인정해 버리고 말았다.
깊이 절망으로 가득 찬 간극 속에 떨어져 내릴듯 아득함이 머릿 속을 뒤덮혔다. 간격과 간격의 사이에서 도무지 좁혀지질 않을 새 하얀 고결을 잃고 무너져 간다. 주자서가 살짝 인상을 썼다. 겨우 버티고 선 거대한 간극은 자꾸만 다시 추락시켰다.▷ ▷ ▷ ▷
"아니, 이봐~ 저기요. 내 마─음─의 상─처를 두 번씩이나 언급했으면 반응 좀 보이라고? 왜 무미건조하게 그냥 넘어가"
억울함을 호소하여 조금이나마 관심을 끌어내보겠다고 단어 마디 마디 말투의 억양에 강조 표시를 피력하였다. 온객행은 마구 과장스러운 손짓을 하며 투덜거렸다. 주자서는 무심하게 한숨을 뱉으면서 대꾸했다.
"일부러 넘어간 거면 슬슬 눈치 채라~ 내가 뭐라고 말해줘야 되?"
"아니 아니, 그건 이쪽이 할 말이거든? 내가 장난을 칠 때까지 눈치채지 못한 네가 바보잖아~ 아서 바보!"
"또 시작이지"
"의외로 이런 거에 둔감한 편인 거 아냐?"
"뭐라고? 둔감? 너 죽을래?!"
"안 죽을래~ 네 손에 죽는 건 절대 사양이야"
칠규삼추정의 대가를 끌어안고 있는 사람한테 뭐? 둔감이라니.. 어이가 없어진 나머지 태클을 걸 기력조차 사라졌다. 몸에 7개의 독이 든 못을 박아 넣은 후유증으로 서서히 잃어가기 시작한 오감은 인기척 마저 느끼지 못할 정도로 이전보다 감각이 훨씬 더 떨어져 있었다. 누가 등 뒤에 와서 깜짝 놀래키기 전까진 거의 본능을 의지할 느낌적인 느낌이었다. 물론 그가 자신의 감각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게 나름 위로가 되었다.
"어이, 어제 칼을 갈아서 날이 아주 예리하게 잘 섰거든~ 백의검에 좀 베여 봐야 정신을 차리지"
"항상 불리하면 맨날 백의검을 빼어들겠대"
"닥쳐~ 상대해주기 귀찮아"
주자서가 대충 얼버무렸다. 자신을 변호하진 않았다. 용서받을 여지를 남긴다는 것은 도피고 사치다. 지금은 내 눈앞의 녀석이 곁에 있어주는 상황을 감사히 받아들여야 할까- 아, 확실히 주자서는 온객행을 만난 이후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고 반추했다.
허나, 서로 같은 걸음을 맞춘다 해서 이 많은 과오와 희생이 쉽게 잊혀질 리 없다. 긴 호흡을 고른 뒤, 주자서는 옅은 고갯짓으로 온객행의 얼굴을 주시하였다. 그는 적어도 자신에게 일말의 분노 따위 조금도 성토하고 있지 않았다.
"괜찮잖아~ 사람이 살아가는 인생이 다 그런 거지, 뭐"
감각을 잃었어도 나아갈 목적은 잃지 말아야 한다. 사명이라는 무거운 책임을, 죽지 못해 사는 시체 마냥 인형처럼 운명에 이끌려가 종속을 지배받아선 안 된다. 그것만큼은 합리화 하고 타협할 생각 없다. 비인간적이던 저를 인간미 넘치게 만든 것도 바로 그다. 주자서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뜨며 길게 여운을 끌었다.
"한 번만 더 그렇게 해 봐~ 그땐 노온, 네가 귀곡주이든 뭐든 단번에 밀어서 귀곡 밑바닥에 확 처넣어 줄 테니까 그리 알아"
"하여튼 까칠하긴.. 이 사람이 정말 못 하는 말이 없어"
"시끄러워! 꺼져!"
"아, 간다. 가-"
온객행이 입술을 삐죽 내밀어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연신 발소리를 직직댄 채 방을 나섰다. 주자서는 맞은편 벽의 정면을 응시했다.
시력이 저하되어 흐릿하게 보였지만 나쁘지 않았다. 이 순간에도 퍽 난폭하게 침식하여 둘러싸인 식물들에 낭만을 꿈꾸고 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