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가이와 쟈그라의 네잎 클로버 이야기
미칠 듯이 시끄럽게 울리던 사위가 조용해졌다. 지구의 사람들은 분주하게 움직여 퇴근길을 재촉했으며 이럴 때 괴수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것만 해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한번 괴수가 나타나면 일이 복잡하게 흘러가니까 귀찮다. 우주엔 무수히 많은 울트라맨들이 악과 맞서 싸우면서 멋진 활약을 하고 있다지만 그래도 우주는 여전히 위험한 것이 가득한 곳이었다. 저마다 마음을 싣고서 자신이 믿는 정의를 관철하기 위해 나아가는 그런 영웅도 있다고, 그렇지만 나는 이 세계에는 빛도 어둠도 없다고 저글러는 생각했다.
빛이 어둠이며 어둠이 빚 그 자체. 모든 것은 허무를 품어버린 빛과 어둠이 만들어가는 이야기 따위 같잖은 소리다. 선도 악도 아닌, 어떻게 보면 선악이 공존하는 존재라 할 수 있는 저글러가 설마 요즘은 많이 물러졌구나 싶어서 피식 웃음이 났다. 바보 짓도 정도껏 해야 말이지.. 어느 순간부터 정의의 편을 들며 정의 운운하는 말을 하고 있으니 정말 한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주 어느 행성의 근거지에서 잠시동안 거처 삼아 머물고 있던 저택 안은 의외로 저글러의 취향 따라 맞춰진 공간이었다. 이전에는 아무것도 없이 텅 빈 공간을 더 선호했을 터인데 이젠 무언가를 끊임없이 계속 원하고 또 그것을 찾고 있었다.
오늘도 언제나 부딪히고 곤란한 일만 가득이라도 사람은 역시 마음 속에 감정이 채워지기 때문인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예전이었다면 전혀 상정하지 않았을 문제다. 이런 내가 바꿀 수 있다고, 바꿔나갈 수 있다고, 변하게 만든 건 오랜 시간에 걸쳐 다져온 유대 아닐까 말하면 과거의 나와 타락한 울트라맨 베리알과 트레기어는 아주 코웃음을 쳤을 것이 분명하다. 비록 그 의지가 깃든 메달의 힘이라고 하나, 울트라맨 제트인 하루키가 베리알의 힘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니까 왠지 가이가 떠올랐다.
뭐, 타락한 울트라맨인 만큼 어둠의 힘을 빌려 변신하는 것은 굉장한 일이라 확실히 볼 만한 가치는 있었다. 사실 나츠카와 하루키를 보면 너무 쿠레나이 가이 그 자체여서 볼 때 마다 묘한 기분에 사로잡히곤 하였다. 종종 지나가는 말을 꺼낼 때도 한번씩 그 녀석이 쓸 법한 대사를 꺼내 사람 놀라게 만들어버리는 사람이다.
베리알의 힘을 쓰다가 되려 자기가 어둠에 삼켜지는 듯한 기분에 빠져 혼자 괴로워 하던 가이와 비교하면 하루키는 덜한 편이긴 했다. 어둠의 힘을 쓰려면 이에 걸맞는 강함이 필요하다고 가이는 또 다시 빛을 품어 성장했지만 말이다. 하여튼 지나간 추억은 늘 가슴이 찌릿하게 아련하다니까──
"들었어"
"......"
"네가 지구에서 대괴수 로봇 부대 스트레이지의 방위대 대장으로 활약한 소식-"
"그런가"
"왜, 그리워? 스트레이지 일원으로서 보낸 시간 말야"
"누가 그립다고 했냐?"
"그런데 왜 그런 표정이야?"
나는 원래 이런 표정이었어! 라고 한 소리 나오려다 말았다. 그만하자- 입씨름 하면 괜히 저만 힘들어질게 뻔하니까 내가 말을 말아야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깜빡거린 가이가 다시 마시고 있던 라무네로 시선을 돌렸다.
"어이, 그만 먹어라~ 지금 라무네만 도대체 몇 개 째냐?"
"겨우 두 병이거든"
"..... 스트레이지에서 보낸 시간은 결코 거짓이 아니야~ 매 순간 마다 전력이었어~ 진심으로 울고 웃고.."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갑자기 동문서답하는 저글러의 말에 가이는 라무네를 내려놓았다. 투명한 액체가 살짝 입가를 타고 흘러내렸다. 입 안에서 한모금 시원하게 들이킨 소다 맛이 사이다처럼 톡 터져 상큼함이 퍼졌다. 이번에 가이가 그를 찾아온 건 딱히 별 다른 이유 없었고 그저 우연한 기회였을 뿐이다. 현재 울트라맨 선배들과 우주의 평화를 어지럽힌 괴수를 뒤쫓다가 무사히 사건을 해결한 뒤 M78 성운을 향해 돌아오는 도중 그의 소식을 듣고 다시 마주하게 된 오랜만의 만남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나도 그 이야기 들었다. 뉴 제너레이션즈 울트라맨들이 모두 집결해 트레기어와 싸운 일로 엄청 유명하더라"
"모를 리가 없지~ 덕분에 어떤 괴수는 내 팬도 있다는 모양이야"
"팬?"
저글러는 크게 웃어젖혔다. 가이는 점점 더 빛의 전사가 되어 가는구나 싶었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그리고 그의 곁을 떠나버린 이후 시간들보다도 한층 빛을 머금어 품은 존재가 되었다.
"너 많이 변했다."
"내가 변했다고?"
"응~ 이전의 너라면 상상조차 못했을 텐데-"
"그래~ 많이 변했지- 그렇게나 혐오하던 정의 운운하면서 지구방위대의 대장 노릇했으니까 나 꽤 좋은 놈이잖아"
"뭐? 네가? 네가 좋은 놈이라고? 이해를 할 수 없군~ 하루키한테 우리가 처음 만난 날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네가 벌인 악행 낱낱이 다 알려주고 싶은데- 저글러가 좋은 놈이라니.."
"시끄러워!"
그 이후부턴 말이 없었다. 괜히 어색해진 까닭이었다. 다음 활동을 하기 전까지 소비된 체력도 보충할 겸 가이는 계속 라무네만 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그 옆에서 저글러는 무언가 열심히 만들고 있었다. 가이가 라무네를 손에서 내려놓고 시선을 그에게로 향해 말을 걸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뭘 만들어?"
"보면 모르냐~ 커피-"
"아, 그래"
생각보다 이들의 대화는 은근 단답형식 같은 표현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가타부타 여러 말 하지 않아도 알아서 알겠지, 같은 걸 염두하고 있었기에 그런 불필요한 내용 없이 꼭 해야만 하는 할 말을 해도 그러려니 하고 지나치는 편이다. 아직 감정적인 부분이 많이 남아 있다거나 갈등이 예전보단 많이 풀렸다거나 하는 것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두 사람한테 있어 그것은 이미 지나간 덧없는 과거에 불과했으며 오히려 현재를 살아가는 데에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려 수천 년 동안 알고 지내던 사이다. 이래저래 미운 정 고운 정까지 다 들면서 지내왔으니 당연히 서로 모를 리 없었다. 누가 어떤 취향이고 무엇을 선호하는지 문제를 낸다면 간단히 맞출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었다. 가이는 그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했다. 저글러가 비록 용서할 수 없는 악행을 많이 저지른 편이긴 하지만 결코 악인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또 절대 선인은 아니다.
그 나름의 정의와 신념을 관철했을 뿐, 분명한 건 선과 악 중 어느 쪽도 아닌 녀석에게 있어서 솔직히 어떤 식의 수식어도 좋을대로였다. 불현듯 뇌리에 스쳐 지나간 그와의 대화 내용 중엔 이런 말을 떠올렸다. 어차피 지나간 시간은 못 되돌리니까 지금을 살아가는 거라고─ 성격도 다르고 이상주의자인 가이가 유일하게 현실주의자인 저글러를 공감했던 말이었다.
"나 요즘 새로운 취미가 생겼어"
"무슨 취미?"
"분재 키우는 거-"
"분재? 너 설마 아직도 그 일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냐?"
"당연하지~ 지금은 이제 내가 빛의 전사에 선택 못 받은 건 꽤 신경 쓰지 않고 있지만 뭐랄까, 행성 카논에서 생명의 나무가 악마의 나무 같다며 베어버린 일은 그, 나라도 역시 조금 죄책감이 있으니까.."
"그래서 분재 키우기 시작했던 거야?"
"자, 여기- 커피나 마셔"
"음.. 향이 좋네"
일부러 커피를 태워준 이유는 이 이상 말하지 말라는 입막음 용이다. 금방 커피 향이 확산되어 주변의 공기를 에워쌌다. 머그컵에 담긴 커피 때문에 데워진 컵의 표면이 살짝 뜨거웠다. 모락모락 김이 올라와 시야를 흐릿하게 만들었다. 약간 인상을 쓴 채 미간을 찡그린 가이가 입술을 앞으로 쭉 내밀어 후, 하고 분 뒤 한모금 마셨다. 괜찮은 표정이 되어 만족하는 모습을 보자 그제서야 저글러는 자신의 커피를 홀짝 마셔댔다. 온기가 전해져온 뜨거움을 느낀 혀의 감촉이 기분 나쁘지만은 않았다.
밥을 먹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가이는 그 전에 뭐라도 공백을 때울 것이 없냐고 물어봤다가 계속 라무네만 마시고 있는 주제에 무슨 얼어죽을 공백이냐며 한소리 듣고 말았다. 어쩐지 아까부터 고분고분 나긋하게 말하더라니 진작 알아봤어야 했다. 하여튼 그 놈의 성격 어디 가냐고- 마음 속으로 중얼거린 가이가 또 다시 익숙하게 본능적으로 라무네에 손을 뻗었을 때 저글러가 저지했다.
커피 마시라고 네 녀석의 몫까지 준비했는데 멀쩡한 커피 놔두고 왜 자꾸 라무네를 찾는 거냐면서 톡 쏘아붙인 후 접시를 내려놓았다. 식빵 안의 치즈와 햄, 마요네즈를 뿌린 샐러드가 들어간 샌드위치가 두 개 놓여 있었다. 과연, 한입 와앙 베어물자 빵과 빵 사이에 든 음식이 한데 어우러져 풍미 가득한 맛이 났다.
"맛있어"
"다 먹고 나면 꺼져라"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너 처음부터 울트라맨이 아니라 오히려 울트라맨 서포터하는 능력에 더 적합했던 거 아니야?"
"울트라맨 서포터인가.."
그 사이 검을 소환한 저글러가 칼집을 뽑아 붉은 손수건으로 사심검의 칼날을 닦았다. 사심류 사심검은 그의 일부라 할 수 있을 만큼 굉장히 아꼈다. 샌드위치 두 개를 전부 먹은 가이가 식어버린 커피를 마저 마신 다음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 먹고 나면 꺼지라고 했으니까 뭐, 사라져 줘야겠지 싶어 그냥 적당히 주변을 치우고는 조용히 저택을 빠져나왔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저택의 뒷뜰에 있는 작은 마당을 발견하였다. 이 앞에는 초록 빛깔의 토끼풀, 즉 클로버가 무성히 피어 있었다. 클로버라고 하니 가이도 흥미가 일었다.
수많은 세잎 클로버 중에서 잎이 네장인 네잎 클로버를 찾으면 엄청 행운이라는 말을 어디서 들은 적 있었다. 가이는 곧 허리를 숙인 채 그것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찾아도 온통 세잎 클로버 뿐이었다. 하긴, 그렇게 간단히 나오면 행운이 아니겠지.. 하지만 왠지 오기가 발동해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장장 한 시간 동안 풀을 헤쳐 보아도 특별히 잎이 네장인 풀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처음과 달리 슬슬 지쳐버린 가이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 앞에서 무언가 건네진 것은 손에 들린 네잎 클로버였다. 그토록 한참 찾아도 보이지 않았는데 저글러가 먼저 발견한 모양이었다.
"저글러? 이게 뭐야? 네잎 클로버잖아! 어디서 찾았어? 그보다 네가 여기 왜 있는 건데?"
"가이, 질문 하나씩 해라~ 너 눈을 어디다 두고 있냐? 나 옆에서 계속 찾고 있었다."
"네잎 클로버 찾느라 정신 팔려서 몰랐어"
"하여튼.."
가이는 저글러가 내민 네잎 클로버를 손에 받았다. 뭐라 형용할 수 없지만 그래도 정말 행운이 찾아올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극히 수천 년 세월의 단편적인 기억의 조각일 뿐이나 예전에 한번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래, 그날도 우리들은 괴수를 무찌르고 난 뒤 돌아오는 길이었다. 때마침 저녁 노을이 붉게 번지는 행성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별이 빛나는 까만 밤하늘과 여타 다른 배경이 비춰진 풍경이 쏟아내렸다. 녹음이 드리운 세잎 클로버 사이로 어렵사리 네잎 클로버 하나를 발견하고 소리쳤을 땐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저글러- 네가 만난 하루키는 어때? 어떤 사람이야?"
"누구랑 꼭 닮아서 열혈적인 면은 앞뒤 안 가리고 뛰어드는 거랑 똑같은 녀석이야"
"그렇군~ 저글러- 후배한테 조언도 해주고 정말 변했구나"
"하아? 가이- 누가 서포터였는지 잊었나 본데 나 원래 너에게 엄청 조언해줬거든? 네 녀석이 내 충고를 안 듣고 멋대로 마음 가는대로 행동한 거잖아~ 게다가 난 선배도 뭐도 아니라고- 같은 울트라맨인 네 후배이지~ 두 번은 없으니까 앞으론 네가 챙겨라"
"그게 악마 같아도 말이지"
"말했잖아? 난 선도 악도, 그 어느 쪽도 될 수 있다고- 단순한 변덕이었을 뿐이야~ 시간을 되돌려도 난 다시 생명의 나무를 베고 네 곁을 떠나고 타락해서 똑같은 짓을 할 걸"
"......"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그때가 가장 우리 인생에서 빛나던 순간이다. 그렇다 해도 운명을 바꿀 기회가 온다면 절대 다시 시간을 되돌리고 싶지 않아~ 난 지금을, 현재를 사는데 만족하거든"
여전했다. 많은 것들이 달라졌지만 자신이 가진 본연은 변하지 않은 걸지도.. 뭐야, 역시 아닌 척 해도 내 생각하고 있잖아- 저글러는 가만히 가이의 어깨에 손을 툭 얹진 뒤 클로버가 가득 핀 공간을 벗어났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콧등을 쓸었다.
조금 뜸을 들이고 한참 만에 '안녕-'이란 어색하기 짝이 없는 담백한 인사를 멋없게 건넨 뒤에는 돌아보지 않고 손을 들어 제스쳐를 취한 저글러가 언제부터 우리 사이에 그런게 있었냐며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는 듯 무심한 목소리로 한마디 내뱉었다. 그리고 클로버는 자기한텐 필요없으니까 선물로 주는 거라고 말을 이은 후 저글러스 저글러는 무환마인으로 변신한 채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졌다.
무환마인- 환상은 없다는 뜻인가.. 그야말로 저글러다운 수식어였다. 몇 번 이리저리 응시하다가 품 안에 고이 간직한 네잎 클로버를 뒤로 한 채 그는 이윽고 오브 칼리버를 꺼내들었다. 익숙해지면 안 될 것까지 익숙해지면 안 되는데 무릇 버릇이란 것은 여간 무섭지 않았다. 세게 힘을 실은 손 안에서 오브 칼리버가 왠지 저글러의 사심검과 겹쳐 보인 듯한 착각이 일었다.
마음과는 달리 무뎌진 칼날을 던진다는 것은 알 수 없는 법이라 그랬을 지도 모른다. 가이는 웃고 있지 않았지만 한쪽 입꼬리를 스윽 올리곤 이내 조금 흐트러진 모자를 고쳐 썼다. 창이 넓은 모자인 터라 숨기고 싶은 얼굴의 감정을, 겉으로 드러나는 표정을 그 밑으로 숨길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그리고 나서 늘 그랬듯 항상 하던 행동처럼 눈을 감은 채 오브니카를 불었다. 어디선가 산뜻한 미풍이 살짝 불어와 쿠레나이 가이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특촬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答えはひとつ! (0) 2021.03.09 우주 정류장에는 항상 네가 기다리고 있었다 (0) 2021.03.09 어둠을 끌어안은 빛 (0) 2021.03.09 망상 절정☆Imagination (0) 2021.03.09 일그러진 바람 (0) 2021.0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