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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우리들은 아직 순수했다-
「이 노트에 이름이 적힌 자는 죽는다. 이름 뒤에 인간계 단위로 40초 이내에 사인을 기록하면 그대로 죽는다. 사인을 적지 않으면 전부 심장마비로 죽는다.」
- 그야, 라이토 군은 저의 첫 친구이니까요.
데스노트, 이른바 죽음의 노트라 불리는 그것은 죽음을 심판하는 노트에 이름을 적으면 죽는 신기한 노트-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와서 이렇게 처참히 무너질 수 없다. 한번, 두번, 안 되면 세번, 네번, 그것도 안 된다면 열번, 백번, 몇 수백만번이라도 할 수 있다. 나는 그것이 가능하다. 새로운 이상의 세계를.. 신세계를.. 어디선가 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죽은 주제에 아직도 나한테 정의 타령 따위같은 헛소리를 하다니 어이가 없었지만 이젠 닥치라고 소리 지를 힘도 없어서 그냥 무시해버렸다.
우리들의 첫 만남이 어땠더라? 니아와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인 Yellow Box 창고를 향해 걸어가는 중 라이토는 문득 세계 최고의 명탐정인 엘과의 처음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생각하기도 싫을 녀석이지만 그때 왜 그가 그렇게 떠올랐는지 모른다. 필사적으로 자신이 데스노트를 가진 키라라는 걸 숨기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계속 키라로 의심받던 라이토가 엘이 자신을 직접 만나길 원한다는 말을 듣고 키라 대책실에서 처음 제대로 마주했던 때이다. 잊을 수가 없지- 그 잘난 척 온갖 폼을 다 잡은 채 능글맞은 미소를 짓는 얼굴을 하는 모습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그 얼굴을 떠올리자 괜히 화가 났다. 살짝 쥔 주먹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래, 어쩌면 그 시절이 가장 순수했을거라 라이토는 생각한다. 이젠 좀 알 수 없게 되어버렸지만 적어도 그때엔 아직 늦지 않았던걸지도 모른다. 본인도 알고 있었다. 아직 완전히 타락하기 직전이었으니까 타락의 길을 걷고 있어도 나락으로 떨어지진 않았다고 어딘가 자신의 마음 속에선 그렇게 믿고 싶었던걸까?
"엘- 아버지와 다른 분들은 모두 어디갔어?"
"자, 글쎄요?! 오랜만의 휴일에, 사적인 일에, 다들 개인적인 시간을 보내러 갔습니다만? 아, 와타리는 마트 갔습니다."
"그렇군~ 용컨대 말하자면 지금 여긴 너와 나, 우리 둘만 남았다는거지"
"......"
엘은 라이토가 뒤에 뭐라 말을 하든 말든 상관없이 저는 그것과 무관하다는 식의 태도를 일관하며 초콜릿 포장지를 깠다. '어이, 이봐! 내 말 듣고 있는거냐' 라이토는 그가 못마땅하다는듯 두손바닥을 업무 책상에 쾅 세게 내리쳤다. 여전히 대답을 받아주지 않은 채 연신 단 것들을 집어먹던 엘이 갑작 의자에서 몸을 돌려 라이토 쪽을 휙 뒤돌아보더니 말했다.
"라이토 군! 저 커피 좀 내주실래요? 각설탕 가득 넣어서-"
"..... 뭐? 어이- 너, 손이 없냐? 발이 없냐?"
"라이토 군!"
"싫어! 네가 직접 좀 해라"
"글쎄- 전 누구한테 명령하는 쪽이 훨씬 편해서 말이죠"
마침 주변 사람들도 나가고 없겠다, 와타리 씨도 아직 밖에서 돌아올 기미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니까 살짝 주먹다툼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생각하는 와중에 벌써 자신의 생각을 읽어버린 엘이 괜히 얄미워서 멱살을 잡은 채 크게 소리쳤다.
'수사 목적 하라지만 어디까지나 우리가 서로 적이라는 걸 잊지마라!' 그 말에 엘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능청스러운 말투로 '그럼 당신이 키라라고 인정하는건가요? 원래 강한 부정은 긍정인 법이거든요.'라고 말했을 뿐이다. 화가 풀리지 않은 채 라이토는 엘을 노려보았다.
"뭐, 제 입장에선 지금 당장 취조실에 잡아들여서 고문해도 상관 없습니다만, 어디까지나 저흰 수사 목적의 같은 대학 동기입니다."
"내가 키라라고 의심받는 건 물론, 잠입 수사와 감시도 귀찮은데 너랑 같은 대학교를 다니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짜증나"
"그래서? 라이토 군! 커피는 언제 타주실건가요? 라이토 군- 라이토 군- 야가미 라이토 군-"
"그러니까 왜 내가 해야되는건데??"
입꼬리를 사악 올리면서 시간차 이름 부르기 공격에 결국 더 참지 못하고 라이토는 멱살을 잡은 손을 스윽 놓았다. 이 와중에도 엘은 달고 진하게, 각설탕 가득 얼음 띄워서 아이스로 해달라고 요구하였다. '뭔, 요구하는게 왜 이렇게 많아!' 툴툴거리면서 그는 어쨌든 녀석이 원하는대로 따라주었다.하고 싶지 않지만, 절대 하고 싶지 않지만 커피를 태울 잠시동안 옆에서 저 녀석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마음 편했다. 오히려 이 짧은 찰나의 몇 분 밖에 걸리지 않는 시간이 더 낫겠다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굳이 요구하지 않았지만 단 것을 찾기 위해 이걸 갖다달라, 저걸 갖다달라 등 이것저것 시켜서 마구 부려먹힐 것이 뻔할듯해 괜히 귀찮아질 것 같아 마침 치즈 케익을 꺼내 함께 건네주었다.
"자, 여기-"
"고맙게 마실께요."
엘은 커피잔을 들어 조용히 눈을 감았다. 살짝 한모금 마시면서 천천히 맛을 음미하였다. 단 각설탕에서 온 커피의 진한 풍미와 단맛이 조화롭게 어우러졌다.
".... 저는 말이죠...."
달그락- 커피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두어 번 헛기침을 한 엘이 천천히 운을 띄우면서 말했다.
"유능한 탐정으로서 세계 전국에서 활동했죠~ 그리고 그때 마다 많은 일들을 봤고 여전히 범죄는 끊이지 않았어요. 한번은 포기하려고 한 적도 꽤 있었습니다. 탐정 일을.. 그런데 왜 제가 그만두지 않은지 알아요?"
"왜인데?"
"저는.."
엘은 잠시 뜸을 들었다. 살짝 한조각 베어먹은 치즈 케이크가 달았다. 말할까 말까 뭔가 망설이는 눈빛이었다. 깊고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과연 진짜 키라일지 모르는 사람한테 이런 말을 함부로 내뱉어도 되는걸까, 일말의 망설임이 있었지만 엘은 다시 커피를 한모금 마신 뒤 결심한듯 말했다.
"슬퍼.. 보였거든요. 굉장히 괴롭고 그 무언가.. 인간은 누구나 과오를 저지르며 살아가죠~ 정말 사소하게 어릴 때 다른 친구의 장난감이 부러워서 그 물건을 몰래 가져와서 내거라고 거짓말한 정도는 한번쯤 있는 일이잖아요? 그런데 그러면서도 인간은 어째서 발버둥치는걸까? 그렇게 해서 갖고 싶었던 건 대체 뭐지? 과연 그토록 원하던 걸 손에 넣으면 그 다음엔 뭐가 기다리고 있을까.. 어떤 세계가 비칠까.."
"인간이 유토피아를 원하는 것은 당연하잖아? 경험해보지 못했으니까, 사람은 누구나 달콤한 열매를 추구해"
"그러니까 전 지켜보고 싶어졌습니다. 악마가 되어가는 자의 비명을, 외침을, 그리고 그 목소리를.. 전부 확실히 마주하고 싶거든요. 이 세계의 이유 없는 악의라던가, 올바른 정의를 찾고 싶다, 단지 그것 뿐입니다."
라이토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엘의 말에 어떤 말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도 몰라 그냥 잠자코 있었을 뿐, 사실 하고 싶은 말이라면 굉장히 많다. 쌓이고 쌓여 여태 참아왔던건지도 모르겠다. 라이토는 좀 그런 말을 하는 엘이 새삼 어색했다. 전부터 엄청 특이한 인물이라 생각하였지만 막상 지금 이 순간처럼 대하고 나니 탐정이란 타이틀만 제외하면 저와 같은 평범한 인간이다. 신이 아닌 그저 이 세계를 살아가는 한 사람에 불과하였다.
그리고는 두 사람 모두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가 이내 라이토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입술을 떼기 전, 라이토는 몇 번이나 생각을 거듭한 끝에 어렵사리 말을 꺼낸 것이다. 자신이 바라보는 미래나 생각하는 정의는 엘이 믿는 정의와 다르다. 자기자신이 키라니까 앞으로 서로 대립할 사상이 많아질 것이다. 예상컨대 부딪힐 일이 많아질거라는 것은 이미 각오한 바다. 나는 신세계의 신이 될거니까, 그래서 모든 범죄가 없는 세상을 분명 만들고 말테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해?"
"아뇨~ 모두 거짓말입니다."
"하아?!"
어이가 없다. 실컷 자신의 이야기를 떠들어놓고 이제와서 사실 그것은 전부 거짓말이었습니다, 같은 소릴 하다니.. 엘은 어디까지가 거짓이고 진실인지 밝히지 않았다. 그저 애매모호하게 간접적인 표현만 에둘러 한 채 어물쩍 넘겼을 뿐이다. 하지만 분명 엘은 진심이었다.
그에게 결코 절대 거짓말은 없었다. 라이토는 다른 시선을 향했던 곳에서 눈을 돌려 엘을 쳐다보았다. 난, 내가 나로 있기 위해 거짓말한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그러니까 멈추지 않는다.
"그럼 그걸 나한테 왜 알려주는거야?"
"라이토 군은 제 첫 친구니까 정말로 절 실망하지 않도록 하길 바래요."
"아직도 여전히 날 키라 취급이지?"
"글쎄요.."
엘은 입꼬리를 올려 예쁜 미소를, 하지만 다소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렀다. 역시 이번에도 글쎄, 하고 의미를 알 수 없는 애매모호한 말만 하였다. 친구, 친구라는 것으로 말을 포장시켜 아무렇지 않게 표정 하나 변하는 법 없이 기색을 감추지 않고 말했다. 대답 대신 라이토는 책상 위에 얹어진 엘의 초콜릿을 하나 집어들었다.
포장지를 벗겨 나온 초코를 한입 베어물자 혀에 강한 단맛의 자극이 느껴졌다. 이 달콤함.. 그래, 금단의 열매(데스노트)와 닮아있었다. '어어? 이건 제 간식이라고요!' 황급히 막는 엘을 남겨둔 채 라이토는 그대로 대책실을 빠져나왔다. 그런 그를 잠시 쳐다보다 이내 엘은 막대 사탕의 포장지를 벗겨 입에 넣었다. 그리고 여전히 뜻 모를 웃음을 흘렀다.
세상은 불합리하다. 방정식으로는 답이 나오지 않는 그런 불합리적인 요소가 가득 있다. 어째서 모두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저지르는거야? 세계가 좀 더 평화로워졌으면 좋겠으니까, 더 이상 눈물 흘리지 않았으면 하니까, 겁쟁이들인 당신들이 못하는 걸 내가 대신 해주겠다는데 뭐가 잘못된거지? 권력이 있고 법이 있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녀석들보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은 나처럼 키라를 원하고 있다. 썩어빠진 낡은 법 대신 직접 법을 심판하는 자, 그것이 키라다. 자신은 이미 돌아갈 수 없는 선택을 하였다.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사신 류크가 일부러 떨어뜨린거라지만 이게 왜, 어째서 정말 우연하게도 내 눈 앞에서 데스노트가 떨어진 것은 우연이 아니라 생각된다. 걸어가는 라이토의 뒤에 언제 나타났는지 류크가 뒤따르고 있었다. '라이토- 사과! 사과! 사과 줘~' 라이토는 류크 말을 가볍게 무시했다. '닥쳐-' 지금 그게 중요한게 아니다. 좀 더, 좀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렇게 중얼거리는 라이토의 눈빛이 재미있다는듯 류크는 입을 가린 채 킬킬거렸다. '역시 인간은 재밌어! 저기, 라이토- 이제와서 새삼스레 묻는거지만 넌 키라가 된 걸 후회해?' 라이토는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
"크큭- 크크큭- 하하하하하하-"
류크는 얼굴을 옆으로 돌리며 어? 하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과 계약한 인간이지만 정말 쟤가 왜 저럴까 싶은 얼굴을 하였다. 류크는 라이토를 따라 저도 같이 킬킬 웃었다.
"후회? 그럴 리가 없잖아!"
라이토는 데스노트를 꺼냈다. 검은색 바탕의 노트 위에 흰색 글씨로 DEATH NOTE라는 영어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 특별한 힘을 손에 넣은 후 처음으로 자신의 의지대로 싸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까 후회 따윈 하지 않는다. 이건 내가 선택한 운명이다. 설령 상처입어도 이 손으로 행복을 지킬 수 있다면 그 어떤 짓거리도 할 수 있다. 라이토는 걸음을 멈췄다.
"겨우 무능한 자신의 지배에서 벗어나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특별한 힘이 생겼는데 후회할 리 없어~ 인간은 저마다 각자의 길을 선택해 나아가~ 그걸 누가 방해하진 못해~ 나는 지금 내 힘으로 가능한 걸 하는거야~ 저기, 넌 자신이 미래에 무엇이 되어있을지 상상조차 가능해? 아니, 못해- 넌센스적인 말만 늘어놓고선 존재 증명의 가치 따윈 내보이지도 못하지~ 하지만 난 내가 소중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지켜보이겠어~ 이건 나 밖에 할 수 없다고-!!"
라이토는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려 웃었다. 가소로운 표정을 지으면서 다시 걸어갔다. 그는 걸어가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것이 존재 증명의 힘- 마지막에 웃는 건 나다.' 자신을 내보이기 위해서라면 어떤 방법과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그러려면 역시 힘이 필요하다. 어느 누구한테라도 질 수 없는 강한 힘을 원한다. 대의를 위한 소의 희생은 어쩔 수 없잖아? 완벽하게 죽은 눈이 된 라이토는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이것이 엘과 제대로 마주한 채 대화를 했던 날이다. 잠시 기억을 잃었을 때를 제외한, 라이토는 엘을, 아니 이 세계 자체를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그때 우리들은 아직 순수했다. 잠시 엘과의 기억을 떠올렸던 회상은 끝났다. 지금 현재 라이토는 경찰들에 둘러쌓여 최후의 발악을 펼쳤다. 어떻게든 여기에 내가 있다고, 누구나 상처받지 않고 누구나 행복할 권리를 가질 새로운 이상 세계를 만들고 싶었던 사람이 여기에 발버둥치고 있다고 크게 소리쳤다. 그게 이유가 된다면 존재의 의미를 증명시키고 싶었다. 누군가를 위해 나선 것이 이토록 원망을 들어야 하다니 바보 같아- 한심해서 웃음이 나올만큼 바보 같다.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누군가는 해야한다고! 노트를 손에 넣었을 때부터 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어~ 날 이렇게 만든 건 이 썩어빠진 세계잖아? 내가 왜 이렇게 됐는데.. 그럼 달리 이것 말고 어떤 방법이 있는데! 네 녀석들이 하지 못한 걸, 내가 조금 다른 정의를 보여주겠다는데! 그게 뭐가 잘못된거지? 오직 나만이 할 수 있어! 나만이 할 수 밖에 없다고!!"
악에 받혀 소리치는 라이토를 이젠 무력 진압할 수 밖에 없었다. 난무하는 총탄에 이미 전신 여러 군데 흥건히 붉은 피로 적히면서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비틀비틀, 붉은 물감처럼 물들어진 피로 인해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몸을 따라 팔과 다리가 후들거리며 이리저리 마구 흔들린다. 조금씩 조금씩 눈 앞의 시야가 흐릿해진다. 의식을 잃어버릴듯한 기분이라 조금이라도 정신을 놓아버리면 현기증이 나 아찔해졌다. 결국 난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건가?
차가운 바닥 위에서 서서히 눈을 감는다. 조금씩 차갑게 식어가는 제 몸을 가다듬을 수 없이 매우 거칠고 불안한 호흡만을 계속 내뱉으며 라이토는 그대로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지쳤다. 라이토는 지쳐버린 몸을 이끌고 마지막의 마지막에 미친듯이 발악했다. 광기에 물들인 웃음소리가 덧없는 허공과 공명하여 울려왔다. '어째서! 어째서! 나는..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서...' 한참 미친듯이 웃어댔던 소리가 점차 호소에 가까운 흐느낌으로 변했다.
- 그야, 라이토 군은 저의 첫 친구이니까요.
어디선가 엘 로우라이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저 신세계의 신이 되고 싶었을 뿐인데 우리들은 어쩌다가 엇갈려졌을까? 어디부터 잘못된거야? 특유의 차갑게 조소하는 엘의 모습이 제일 싫었다. 언젠가 라이토는 엘에게 물었었다. 엘, 그거 알아? 생명은 절대 컨티뉴 할 수 없어- 단 한번 밖에 없는 목숨, 어째서 헛되이 쓰는거지? 왜 똑같은 인간이 인간을 두려워해야 되지? 더더욱 모순인 건 그렇게나 상처받으면서 그래도 사람은 사람을 원해-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건 매우 가치있는 일이다. 인간의 악의는 점점 더 알 수 없어지고 끝없는 미로처럼 갇혀 헤매이게 된다. 그리고 또한 그것을 정의내리는 힘, 그걸 손에 넣는다면 나도 어떤 특별한 무언가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이론보단 실리를 더 추구하고 그 방식대로 행동했을 뿐이다.
아까보다 피가 더 솟아올라 흘러넘쳤다. 새빨갛게 붉은 피의 맛이 씁쓸하다. 그제서야 야가미 라이토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직감하였다. 아직 죽기 싫다. 할일이 많이 남았는데 여기서 이렇게 죽으면 지금까지 해온 일들치곤 너무 허무하지 않은가! 처철한 몸부림과 울분을 토하며 울부짖는 절규 앞에 류크가 보였다. 모든 건 자신을 위해서 도구처럼 이용했던 사신을 오히려 자신이 사신에게 당하는 꼴이 되어버릴 줄은.. 훗, 또 다시 웃음이 났다.
하아- 숨을 뱉었다. 자꾸만 뜨거운 숨이 턱끝까지 차올라 이젠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뭔가 덧없다. 인생은 마치 화려하게 피었다가 지는 꽃처럼 덧없고 하릴없다. 이것이 특별한 힘을 손에 넣는다는 뜻인가? 그런 능력을 가진 자의 최후는 모두 이렇게 밖에 되지 않는 것은 역시 여전히 불합리적이다.
사신과 함께하는 순간부터 행복해진 사람들은 없었다는 말에 그때 라이토는 분명 이렇게 말했다. 사신이 붙은 인간이라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운명을 바꿀 수 있을거라고, 하지만 자신의 운명은 바꾸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한번 더 크게 미친듯이 웃어댄 것은 데스노트같은 이 특별한 힘이 없어도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미래를 위해,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강한 자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소중한 걸 지키기 위해서 언제든지 키라는 새롭게 몇 번이나 태어난다. 그런 키라들이 많이 나타난다면 세계는 조금 변할까?
류크가 데스노트에 적은 야가미 라이토의 이름이 이제 곧 죽음의 시간으로 향한다. 정말 야속할 정도로 20초, 30초, 40초의 시간은 너무나 빠르게 지나갔다. 39초, 이제 단 일 초만을 남겨둔 상황에서 라이토는 자조적인 헛웃음을 흘렀다. 모든 것이 그저 허무하고 공허할 뿐이다.
유리된 감정이 점점 조각조각 퍼즐을 맞춰가며 잇대어간다. 마지막의 마지막에서야 존재 증명의 이유를 찾았다. 시공이 변하며 세계가 공명한다. 신세계의 신이 만든 시간은 새로운 시간으로 다시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