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령(천애객)

전갈의 길은 전갈

シア 2021. 8. 29. 20:57

* 전갈 수인 전사 갈왕 AU 

* 제목의 의미는 [뱀의 길은 뱀이 안다.] 속담의 패러디 

* 뭔가 AU이긴 한데 본편에서 못 담은 감정들 전부 넣은듯.... 

 

 

"갈왕, 당신이 무슨 일이지? 뭐, 그쪽이 날 부른 이유는 더 듣지 않아도 필시 좋은 일이 아니란 건 알겠어" 

"......." 

"그래서? 목적은 뭐냐~ 설마 지금 나를 불러 세워 놓고 가만히 있을 생각인가?" 

"주자서, 너와 난 서로 닮았다고 생각하는데-" 

닮았다라.. 갈왕은 그리 생각하나 보다. 주자서는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지 몰라 멍하니 그를 바라본 채 서 있었다. 확실히 살수 조직이란 경력이 제 발목을 붙잡는 건 사실이었다. 겨우 자유를 되찾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가. 아직도 모르겠다. 온객행을 부른 거라면 귀곡과의 은밀한 거래 무언가의 합당성을 찾기 위해서라 대체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날 여기까지 이끌어낸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할 거리가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우리가 서로 닮아? 허.. 웃기지 마~ 듣기만 해도 치가 떨리는군~ 아니면 혹시 자신이 그동안 한 일을 이해 받고 싶은 건가? 그런 거라면 유감이네" 

"각각 천창과 독갈의 수령이라는 살수 조직, 그리고 진정한 자기자신에 대한 자유- 뭐가 다르지?" 

"훗- 자유? 진정한 자기자신이라고? 그쪽이 뭔데? 심리전을 쓰기 위한 고도의 전략인가? 내 마음을 떠보기 위해서? 내가 어떻게 나올지, 어떤 대답을 할지 알고 싶었나? 그런데 어쩌나.. 생각보다 아주 정석인 대답이여서-" 

"뭐라고?!" 

"어차피 이젠 천창을 떠난 전 수령일 뿐이고.. 네 녀석의 한가한 잡담을 들어줄 여유는 없다만?" 

"그런다고 해서 속죄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착각인 걸"

"궤변이군" 

그 말대로였다. 쓸데없는 궤변이다. 진짜 세계이든 가짜 세계이든 그게 다 무슨 소용 있지. 어이 없을 정도로 실컷 웃어버리고 난 다음이라면 괜찮을까? 아무 일 없었던 듯이── '그렇다면 내일 사시(오전 9시 ~ 11시) 보도록 하지' 갈왕은 간단하게 요약된 문장을 남겼다. 사실 어떤 식으로든지 더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입 밖으로 꺼낸다고 해서 전부 타인에게 전해지지 않을 감정이나 기분이라는 것도 있기에 마음 속으로만 되내었다. 나는 이곳에 있다. 그건 무엇도 바꾸지 않는다라고.. 


 
                        ▷  ▷  ▷  ▷




분명 어제 처소에서 한바탕 난리가 난 이후였다. 그때 생각하면 진절머리가 날 것 같았다. 왜 내 주위에만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모른다. 어쩌면 이것도 하늘의 운명이 정해진 천명이라는 건가. 그런 운명이라면 전부 망쳐 버리고 싶다. 파괴 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미 시작해버린 운명은 앞으로 나아갈 거대한 존재가 되어 자신을 옥죄어 온다. 마치 사지가 묶여 결박당한 것처럼 그렇게 나는 또 과거에 눈을 돌리고 있었다. 

현실을 마주하기란 무섭고 두려웠으며 '공포'라는 감정을 느낀 채 주변을 둘러싼 어둠이 모조리 빛이 가진 악식을 먹어 치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 품어버린 동경은 절대 놓지 못하고 손을 뻗으면 저 멀리 잡힐 듯 말 듯 희미하게 사라지는, 그리하여 빛은 완전히 어둠에 잠식되어 버렸다. 혹시 이것이 꿈은 아닐까.. 그저 악몽이겠지. 스스로 다독이며 손등을 꼬집으면 괜히 아픔만이 느껴질 뿐이다. 손톱으로 몇 번, 얼마나 세게 꼬집었는지 핏방울이 맺혔다. 씁쓸하지만 괜찮았다. 나쁘진 않았다. 붉은 피가 흐르는 것을 보니 확실히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냥 그런 직감이다. 

후우- 숨을 들이켰다. 긴 호흡을 내뱉은 뒤 단검으로 자해하려다 말았다. 막상 실행하려니까 죽는 것은 역시 무서웠다. 어제 하루는 악몽 같은 시간의 연속이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제 의부인 조경의 히스테리는 날이 갈수록 점점 심해졌다. 최악이군. 갈왕은 한번 쯧, 하고 혀를 찼다. 이렇게나 자기자신이 약하다니- 할 수만 있다면.. 강한 힘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마른 침을 삼켰다. 뒷말을 뭐라 더 이을 수 없어 말끝을 흐렸다. 주먹을 꽉 쥔 손이 미세하게 떨림을 느끼자 그만 기분 나빠졌다.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지? 제멋대로인 인생에 나를 나락으로 밀어 넣고 발버둥치면서 어떻게든 조금 더 목숨을 연명하려 미친 듯이 음식을 먹으면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으로 만족한 채 버티는 건 결국 기만이고 자기 합리화였다. 

독갈의 거처에서 그의 전용 특등석에 앉아 비스듬히 몸을 젖힌 그가 관자를 짚은 채 깊은 생각에 빠졌다. 문득 어제의 일이 떠오른다. 쓸데없는 오호맹이란 관계성 때문에 조경은 위패 앞에서 화를 내며 난리를 치고 이 놈의 조직은 조직대로 난장판이고 여러 문제로 인해 신경 쓸 겨를조차 없는데 요즘 기강을 잡지 않아서 몇몇 일원들은 눈치를 보면서도 은근히 기어오르는 녀석들도 있었다. 배신자야 당연히 목숨으로 처단하겠지만 지금은 그 마저 모든 게 귀찮을 뿐이다. 아, 아무것도 하기 싫다. 그런 사고를 하는 자체가 혐오스러워 인상을 썼다. 

"최악이군" 

천창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또 다른 살수 조직. 그게 독갈이란 이름의 조직이다. 뒷 세계에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는 항상 존재하였다. 그것을 너무나 잘 알면서 절대 놓을 수 없다. 무언가 붙잡을 만한 것이 필요했다. 오직 자신만이 있을 공간. 내가 진정 나 자신으로 있을 수 있는 장소. 그래, 굳이 명명하자면 안식처라 표현 가능할 수도 있겠다. 안식처- 안식처인가.. 무의미하다. 허무 속에서 유의미한 가치를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무슨 일이예요? 그렇게 깊이 생각을 다 하고?" 

"왜? 네가 보태준 거 있냐~ 신경 꺼~ 방해 돼" 

요즘 부딪히는 일만 일쑤다. 솔직히 다른 것까지 시선을 돌릴 여유는 없다. 독보살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당돌한 표정을 지었다. 누군가를 죽이는 것을 업으로 살아가는 조직의 사람들인데 그 중에서도 꽤 특이한 녀석이라 4대 자객 중에서도 우월한 능력을 가진 일원이었다. 갈왕은 귀찮다는듯 대충 적당히 말하자 그녀는 칫, 하고 삐죽 내민 입을 다물었다. 

우리 일족은 조금 특이하다. 겉모습은 인간 형태와 별반 다를 바 없으나 어느 쪽이라고 하면 인간이 아니다. 전갈 꼬리를 가진 이형의 종족에 가까웠다. 우리들의 일족은 태어날 때부터 전갈 형태의 꼬리를 가지고 있어 여러 가지 많은 다양한 기능을 했는데 그 중 가장 큰 특징은 맹독을 숨기고 있다는 점이다. 전갈의 습성다운 문화나 취미, 특기 같은 것도 선조 때부터 대대로 전해지는 듯 했다. 허나, 행복은 그저 잠시 지나가는 바람이라는 것을 당시엔 왜 몰랐을까. 

마침내 고향이 불타오른 장면을 목격하고 말았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선명하게 그려진다. 어려서 아무것도 잘 몰랐지만 이전부터 가타부타 말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낱 어린 날의 치기 정도로 치부했지만. 차마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장면이 검은 눈동자 속에 담긴다. 하지만 갈왕은 그것을 가슴에 간직한 채 심연 속을 불태웠다. 

완벽함 안에 든 작은 일그러진 감정 하나가 삼각형의 꼭짓점처럼 삐죽 튀어나왔다. 그 일그러짐이 커지고 커져 걷잡을 수 없이 커져버린 욕망이 가득 점철되어 감정을 지배한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아까는 미처 간과하지 못했을, 인지하지 못했던 고통이 느껴져 와, 신음을 터뜨렸다. 

"대왕, 혹시 얼마 전의 전투 때문인가요?"

"혼자 있고 싶군~ 물러가라" 

"하지만-" 

독보살이 뭐라고 대꾸했으나 그의 의지는 확고했다.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필요성이 있었다. 정신적으로 압박해오는 육체의 고통은 견딜 수 없었으나 아직 아무한테도 말을 꺼낸 적 없으니 괜찮겠지. 그렇게 또 다시 참아버리면 되었다. 사람들이 모두 물러나고 텅 빈 방 안에 싸늘하게 남은 적막이 고요함을 덧씌웠다. 억지로 자신을 드러내거나 벗겨내지 않아도 좋았다. 타인을 상대하며 혼자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강박증. 언제까지 계속 지속되어야 할까. 타락의 끝은 어디로 가는가── 

"당신, 의외네요." 

"의외?" 

"왜 말 안 했어요?" 

"뭐가?" 

"지금 끝말잇기라도 하자는 거예요?" 

"뒷 단어가 이어지진 않았거든" 

"대왕의 손목에 있던 전갈 문신의 저주- 저 밖에 아는 사람 없잖아요?"

"그건 어쩌다 네가 알게 된 거잖아~ 미쳤다고 내가 내 입으로 진실을 말할 리가.." 

그렇다. 오른 손목의 전갈 문신. 신이 내린 저주였다. 강함을 추구하기 위해 지옥 같은 곳에서 도망쳤고, 강한 힘을 손에 넣기 위해 모든 것을 거리고 독갈의 수령이 되었다. 더 이상 밑바닥으로 내려갈 치부를 들춰낼 만한 잃을 게 없다고 생각하는 바다. 조금씩 움직임에 따라 어느 새 목까지 이동한 전갈 문신에 의해 천천히 독성이 퍼져나감을 어렴풋이 느꼈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듯 하다. 결코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겠지. 조직에 들어서면서 새긴 전갈 그림의 문신은 정말 살아 움직였다. 여담이지만 독갈이 자주 사용하는 무기도 대부분 독침이나 전갈의 행동 습성에서 이것저것 따온 무공이 주를 이뤘으므로, 그렇기에 갈왕의 전갈 꼬리는 독을 이용하여 이런저런 활용도가 꽤 많았다. 

"그래서 어떻게 하실 작정이죠?" 

"..... 천교, 가끔은 생각해~ 귀곡의 귀신들처럼 나도 맹파탕을 마시고 과거를 잊어버리고 싶어~ 그 기억에서 도망치고 싶다. 이대로 이 세계에서 사라져 버린다 해도 나 하나쯤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겠지" 

"진실은 언젠가 반드시 드러나는 법- 그런 방법으로 현실에서 도망쳐 외면할수록 무수한 절망을 맛볼 뿐, 무엇 하나 달라지는 건 없어요. 결단은 자기 스스로 해야 하는 거니까요." 

"결단인가.." 

"대왕은 항상 본심을 감춘 채 거짓말만 하네요. 사실 당신은 상냥한 사람인데-" 

"훗- 이 내가? 웃기지 마~ 난 네가 말한 대로 상냥하지 않아~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죽이는 독갈의 수령이다. 신뢰받는 쪽이 아니라 신뢰하는 쪽이지" 

"..... 신뢰인가- 미쳤다고 생각하고 한 마디 할께요. 우리들은 어째서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휘말리는 걸까요? 상처받을 걸 알면서 애정을 갈구해 버리고..진심이 아니란 걸 알면서 어린아이도 아닌데..." 

"......." 

"그러니까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지 마요. 그런 건 결국 스스로 만든 거짓말에 괴로울 뿐이니까-" 

귀곡의 10대 악귀 중 하나인 염귀 류천교는 본인의 배신을 배신이 아니라고 말했다. 귀곡주 온객행도 이해해 줄지도 모른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배신자라기보단 이해자라고 불러 줄래요? 또 한 사람의 잘못된 선택을 막고 싶었던 것 뿐이예요.'  그 말에 갈왕은 뭐라고 대답해줘야 할지 알 수 없어졌다. 나도 그랬으니까, 라는 뒷말 살짝 흐린 목소리가 떨려왔던 것은 자각하지 못한 모양이지만 그는 확실히 알았다. 


우리들은 정말 무엇을 바라고 있는 걸까? 


전갈의 독은 치명적일 정도의 독성이 강하다. 딱딱한 갑옷을 입은 마냥 피부를 에워싼 몸의 껍질은 거짓말로 속이기 위해 만들어낸 인위적인 형태 같았고 후복부로 이어진 긴 꼬리에는 여러 마디가 나뉘어져 있어 자유자재로 구부리는 것이 가능했는데, 이를 마치 나를 보호하려 펼치는 위장 같았다. 이름부터가 전갈을 의미하는 한자가 아니던가. 갈왕은 이것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저를 전갈로 비유하는 그 자체가 어떤 하나의 수식어 같은 느낌이 들어서, 있는 그대로 꾸밈없는 나를 표현해주는 것 같아서.. 

갈왕은 마음 속으로 정리했다. 천교는 무엇을 할 때에 결단과 이에 따를 대가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내가 내릴 결단은 단 하나. 이제부터 슬슬 그걸 실행할 순간이 온 거겠지. 전갈 수인의 일족인 독갈에게는 한 가지 전해져 오는 비급이 있다. 이름하야 [비술 망천독忘天毒] 이름 그대로 '하늘을 잊다.' 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독이다. 하지만 평소엔 함부로 잘 사용하지 않는 편이다. 이유는 아주 치명적인 맹독을 품고 있는데 전갈 꼬리를 자신의 몸에다 독을 모두 주입하여 무공을 높이는 터라 상당히 무서운 능력이었다. 그렇게 되면 순간적인 힘과 속력은 오르는 대신 자아를 통제하지 못해 결국 이성을 잃은 채 파괴 본능만 남아버린다는 것을── 

천천히 약속 장소로 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만, 발걸음은 마치 밀도된 공기가 압박하듯 짓눌린 것처럼 무거웠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움직이기 힘든 만큼 마음이 복잡한 기분이다. 슬슬 도착했건만 약속 장소에는 주자서 뿐만이 아니었다. 조경, 자신의 의부와 염귀 류천교 역시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거야 의부한테도 일단 말을 전했으니까. 당연하다면 너무 당연한데 어째서 이 마음이 쿡 아려오는 걸까.. 결단을 내리기 전까지 아직 조금 망설였다. 시간은 많으니 여유를 두고 결정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갈아, 무슨 일로 날 보자고 했느냐? 저쪽은 사계산장의 주 장주로군" 

"서론을 막론하고 본론만 말하죠~ 의부, 주자서- 당신의 진심이란 무엇인가요?" 

"진심? 갑자기 그건 왜.." 

"어제 하루종일 내내 생각해 봤어요. 내 나름의 해석을 내린 결론은 이거예요." 

갈왕의 전갈 꼬리가 휘리릭 휘날렸다. 마치 먹이를 포섭하기 위해 조심스레 은밀히 다가서는 포식자 같은 모습이었다. 이따금씩 깜빡이는 검은 눈동자 위로 눈구덩이엔 긴 속눈썹이 햇살에 반사되었다. 완전 무장한 채 경계 태세를 갖춘, 그야말로 전갈의 특성이 드러났다. 거의 죽은 눈을 하고서 이리저리 요동치는 꼬리는 한번 스륵 감기다가 풀어지더니 곧 공격 태세로 전환했다.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의부-" 

"뭐냐?" 

"저는 왜 감정을 죽이면서 살아야 할까요.. 사람은 왜, 왜 마음 속에 감정이 채워지는 걸까요.." 

"갈아.. 도대체 어찌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전에는 이러지 않았잖아!" 

"계속 참아 왔으니까요. 알아요? 내 손목에 있던 전갈 문신이 목 위치까지 이동했거든요. 마지막 발악이라도 해볼까 해서.. 그래서.." 

"그게 네가 결론 지은 결말인가?" 

"주자서, 방해하지 말아줄래?" 

"글쎄- 나의 백의검이 먼저 닿을지, 네 놈의 독이 먼저 닿을지 길고 짧은 건 대 봐야 아는 거지" 

"정말 하시려는 건가요?" 

"천교, 내 싸움을 잘 봐 둬~ 이게 그대가 말한 나의 결단이다." 

갈왕의 꼬리가 다시 흔들린다. 그는 웃지 않은 무표정인 채 눈앞의 싸움에 집중했다. 전갈의 꼬리가 연검의 특징답게 백의검이 구부려지며 탁 튕겨나간다. 간드지게 멋들린 화려한 일기토가 순식간에 주변 기류의 흐름을 바꾸어 놓을 정도로 광경이 하나의 배경으로 겹쳐 어우러진다. 처음에는 갈왕이 우세였다. 매섭게 몰아치는 전갈은 기세부터 먹잇감을 확 물어 낚아챈 뒤 단단히 붙잡은 채 절대 놓지 아니 하였다. 싸움의 전조가 또 다시 뒤바뀌어 이번에는 주자서가 열세가 아닌 우세의 선점을 잡았다. 

마음이 무너져 유리되면 나는 어떻게 되는가. 버틸 수 있을 것인가. 뭐, 이제 이런 것도 모두 소용 없나. 이젠 정말 그 기술을 사용할 때가 온 듯 하다. 이상은 없다. 갈등하고 고민하는 것도 오늘로서 끝이겠지. 갈왕은  생각에 잠겨 눈을 감았다. 우자스러우면서 이런 결론만을 지을 수 밖에 없는 자신을 한탄하며 한숨과 함께 섞여 하얀 숨결을 토해냈다. 

하늘의 무서움까지 잊어버리게 만들 망천독. 가히 그 최강의 힘이라 할 만 하다. 그러니 특별히 무언가를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기술은 배우지만 일생에 있어 잘 쓰지 않는 편이다. 그러나 갈왕은 꼬리를 퍼덕이며 두세 번을 뱀처럼 전신을 휘감아 망천독을 제 몸 안에다 완벽한 치사량의 독을 풀어 주입하였다. 지켜보던 독보살이 그 기술은? 하고 놀란 표정이 되었다. 무슨 상황인지에 대하여 비급 망천독의 위험성은 그녀가 설명하는 것으로 대강 어떻게 일이 돌아가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나를 사랑했다면, 나를 진심으로 생각한 적이 단 한번이라도 있었다면 마지막 쯤은 날 위해서 희생 해 줘" 

누구한테 내뱉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눈앞의 저 사람들에게 하는 말일 수도, 어쩌면 천하에게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모든 독을 풀어넣었을 때 점점 의식이 가물해져 물에 잠식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점점 자아를 잃고 파괴 본능에 지배당하기 직전, 갈왕은 자꾸 호흡이 끊어지는 힘겨운 숨을 깊이 밭아낸 후 말했다. 그리고 그것이 정말 마지막이었다. 

망천독은 힘과 속력은 극상의 최대치를 끌어올리는 대신 파괴 본능만이 남아버린 괴물로 전락하게 된다. 최후의 격렬한 발버둥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디서 잘못된 걸까. 얽히고 설킨 실타래는 대체 어디서 풀어야 할까. 풀려하면 풀려할수록 되레 더 뒤엉켜 가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현재 상태론 도저히 당해낼 리 만무하다. 가벼운 싸움 정도로 받아들었는데 아무래도 진심을 보여야 할 것 같았다. 자아를 잃어버린 파괴 본능은 그야말로 무서웠다. 이후 몇 합을 겨루고 나서도 승패가 나지 않았다. 상대하기 벅찼다. 주자서는 백의검에 힘을 실었다. 아마 이게 최후의 결정타일 것이다. 전력을 다했던 싸움의 종지부를 찍은 다음에야 갈왕의 주입된 독이 풀려 제정신이 돌아왔다. 

그가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채 숨을 고르며 한 마디 끼얹었다. '내가 너와 다른 점이라면, 난 자괴감에 빠지긴 했지만 열등감에 사로잡히지 않았어~ 넌 그 열등감에 진 거야~ 이것이 나의, 지금의 진심이다.' 주자서의 말은 정곡과 함께 의표를 찔렀다. 그 많고 많은 감정들 중 열등감이라는 단어로 못 박아 버리다니..... 

"울지 마라~ 내가 내린 결단이다. 후회하지 않아" 

"하지만.. 대왕은 그걸로 만족하나요?" 

"어~ 충분히.. 그러니까 너는 너대로 살아가라" 

갈왕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내게 경의를 표하는 자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지금은 괜찮았다. 잃어버릴 게 없다고 하나 조금은 잃어버린 시간들에 대해 똑바로 마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무 늦어버렸지만. 이제 자유다. 아아, 죽음으로서 얻게 된 자유는 황량하기 그지 없다. 

감각이 사라진다. 결코 구원까진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나쁘진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의부는 자신을 전부 이해한다는 말을 했다. 가슴 속이 울컥거린다.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지만 한계까지 참아보려 애썼다가 쉴 새 없이 터져나와 그냥 그만두었다. 사람은 어째서 눈물 뒤에 조금 더 상냥해지는 걸까? 신뢰하는 쪽이 아닌 신뢰받는 쪽은 오히려 나였던 듯 싶다. 



나는 분명 이곳에 있다고.. 
이 세계의 존재 증명을... 존재 의의를... 



한 마리의 고고한 전갈의 전사. 전갈의 길은 전갈이 안다. 누구보다 완벽한 이상을 꿈꿨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