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생명에 기대지 않을 감각
* 본편에서 엽백의가 일행에 다시 합류했던 시점의 중간 어느 사이에서 진행되는 이야기
* 비슷한 인생 걸었던 본진 장르 특촬 캐가 생각나서 비명 지름.. 하여튼 본격 오감 하나씩 잃어가는 주자서를 굴리기 위해 쓴 연성 (주관적인 캐해석과 동인 설정 날조 있음
* 원작 소설, 드라마 산하령 기반으로 봐도 OK
권리를 가지려면 무릇 이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법이다. 주어진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건만 지금까지 살아온 발자취를 돌아보는 일은 참 웃긴 이야기였다. 사람이 일생을 살면서 여러 감정들 중 가장 극강의 공포를 느끼는 것은 무엇일까? '공포'라는 단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음에도 생각보다 훨씬 그 감정과 맞물러 닿아 있었단 것이 꽤 불합리하고 역설적인 모순이 아닐 수 없다. 표리처럼 유리된 마음 한 조각을 전부 담아 표현해낸 감정들 사이에서 어떤 이름을 지어 명명하면 좋은가.
서늘함에 가까운 두려움을 느끼며 납득했다. 그만 어이가 없어진 주자서가 훗, 실소를 터뜨렸다. 잠시 일행을 찾아온 엽백의는 온객행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주자서를 은밀하게 불렀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모양인가 보다. 그리 생각하고 장소를 옮긴 그는 엽백의에게서 전혀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다짜고짜 미쳤냐는 욕지기를 섞어가며 퍼붓는 말머리의 서두를 꺼내 풀어버린 모습을 보면서 주자서는 뭐라고 어떻게 이 분위기를 이어야 할지 몰라 눈을 깜박였다.
"미쳤어? 너 미쳤냐?"
"아니, 안 미쳤는데요."
"내가 친절하게 제자 녀석을 위해서 고칠 방법까지 찾아주면 감사라도 하는 게 예의 아닌가? 왜 거부하는지 이해가 안 되는군"
"엽 선배- 제가 스스로 원한 겁니다. 그러니 죽든 말든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두면 안 됩니까"
"허, 말하는 말본새 하곤.."
정말 마음 같아선 방법이고 뭐고 할 수만 있다면 다 내려놓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저도 별 대단치 않은 사람이라서, 다시 한 번 거대한 운명의 소용돌이 앞에 진 채 똑같은 절망을 맛보는 것은 역시 원하지 않은 마음이 조금 더 컸다.
온객행은 귀곡에서 10대 악귀를 이끌던 귀곡주라지, 주자서는 점점 자기 오감조차 못 느끼는 괴물 마냥 비극의 영웅인 척 하지. 이들과 함께하다간 오히려 본인이 정신적 붕괴가 와 미쳐버릴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힐 노릇이다. 태클을 걸 여유도 없어져 멍하니 응시하자 주자서는 다시 대화를 이었다.
"그렇지만 아직 이 정돈 나름 버틸 만 하고요. 퇴화되긴 했으나 완전히 감각이 사라진 것도 아니니까 걱정 마요. 제 몸은 제가 알아서 챙기겠습니다. 뭐, 사실 거의 아예 못 느끼는 수준까지 이르렀지만.."
"..... 글쎄, 네 옆을 항상 지키는 그 녀석이 널 가만 두지 않을 성 싶은데- 온객행한텐 뭐라고 변명을 둘러댈 셈이냐"
"몸이 약해서 상태가 잘 안 좋은 편이라 해두죠"
"그런 거짓말이 통할 리가-!!"
"......."
"포기하지 마~ 운명에 지지 마~ 지금 말해줄 수 있는 건 그것 뿐-"
엽백의는 다소 퉁명스러운 듯한 어조를 담아 그에게 충고에 가깝게 조언하였다. 그런다 해서 분명 저 녀석이 조언을 들을 사람이 아니란 걸 너무나 잘 안다. 매사 신념이 확실한 주제에 의외의 이면은 겉보기보다 꽤 고집이 세단 말이지. 하여튼 거기서 왜 그런 운명 운운하는 말을 꺼냈는지 열거하면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우스웠다. 아까 흥분되었던 감정은 이제 조금도 기분이 나지 않아 무미건조해졌다.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도 별 의미 없을 거라 판단하고 그가 바닥을 박차듯 거칠게 자리를 떠났다.
한동안 주자서는 그곳에서 가만히 서 있었다. 새 하얀 순결의 색이 일렁거렸다. 이 순간 마저 고고한 척 고결함을 지킨 채 유지하려 들었다. 본래 인간이란 어리석은 존재다. 천천히 이전의 기억을 덧씌워내던 즈음 내가 살아남지 않으면 약한 자는 강한 자에게 먹혀 힘을 지배당할 뿐이라 말했던 온객행의 모습을 떠올렸다.
당시 주자서는 그 일을 긍정했다. 진실을 알 때 현실을 마주하지 않고 시선을 회피하여 과거로 눈을 돌려 그럴듯한 사건을 부여잡은 뒤 그땐 그럴 수 밖에 없었다며 읊조린 자기 합리화 따위 우자였다. 어느 쪽으로 보나 그런 건 결국 자기만족인 데다 그저 정당화 시키려 든 기만일 뿐이다.
천창의 전 수령. 아마 지워지지 않을 상처처럼 평생 따라다닐 꼬리표. 또한, 주자서란 사람을 한 마디로 나타낼 수식어였다. 어느 새인가 감정을 지운 채 살아왔던 날들이 무색해져 버렸다. 수많은 동료들과 이와 관련된 주변 사람들의 죽음을 목격하고 있으면 일말의 죄책감을 가지면서도 누군가의 희생을 당연시해왔다. 이미 정점에 서서 군림한다는, 가장 높은 위치인 정상의 자리가 무엇인지 진정 그 미혹을 깨달아버린 후 그때부터 흑백의 논리로 나눈 삶과 죽음, 두 경계를 가로지른 선악의 평행선에서 제 3자의 시점으로써 바라본 광경은 암담하게 흔들리는 세계만이 남았다.
한번 허무를 느낀 마음은 이 이상 가슴 속에 무엇인가 감정을 채워도 결코 메꾸어지지 아니 하였다. 여기서 더 잇대어 보려 발버둥 치면 되레 자기자신이 매우 비참해질 자각을 인정하는 것 밖에 되지 않았다. 사람은 더 내려갈 곳조차 없어 완벽히 무너진 밑바닥을 경험하고 나서야 그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는다. 스스로 독이 든 못 7개를 박아 칠규삼추정을 행한 일은 순전히 반쯤 계획되었고 나머지 반은 충동적으로 행동했던 것이다.
3년이란 죽음의 유예 속에서 끝내 오감이 파괴되고 무공을 잃어버릴 공포와 대가에 대한 합당한 용기를 받아들인 결과다.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와 달리 별개로 씁쓸함을 감추지 못해 주자서가 쓴웃음을 지었다. 희미하게 웃는 얼굴은 초점이 사라져 검은 눈동자가 갈 목적을 잃고 이리저리 방황했다. 자신의 신세 처지를 비탄하기엔 지난 과거를 돌이켜 본다면 그런 자유를 꿈꿀 자격 따위 절대 가져선 안 될 인간에 불과하다. 그 마음을 너는 알까? 유쾌한 표정을 지은 네가 한참 날 찾은 모양인지 여기 있었네, 겨우 찾았다는 말을 내뱉었다.
"저녁을 먹어야 할 거 아냐~ 어서 성령이 불러와~ 밥 먹게-"
"별로 안 먹고 싶은데.."
"조금이라도 좋으니까 한술 떠~ 모처럼 내가 화려하게 상 차려놨는데 설마 거절하는 건 아니지?!"
"알았어~ 알았어"
그래, 지금은 사소한 건 신경 쓰지 않도록 하자. 언제가 될진 모르나 살아있는 현재를 소중히 여기고 싶은 마음이기에 그랬다. 세 사람이 마주 보고 앉은 채 함께 저녁 식사에 집중했다. 평소에 비해 오늘은 어째서 별 다른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주자서는 밥 한술을 떠 먹을 때 마다 젓가락을 든 채 계속 고개를 갸웃거렸으며 가끔 온객행이 분위기를 띄워보겠다고 장성령을 부추겨 주제를 던져 말하긴 했다만──
"노온- 밥이 좀 싱거운데?"
"에, 무슨 소리야.. 우리가 적당히 먹을 수 있을 만큼 간을 했다고-"
"아, 그래?"
주자서는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다.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듯 했다. 그것은 대단히 현실 감각이 없었으며 매우 비일상적이었다. 뭐지? 다시 한번 상찬을 맛봤을 땐 감각이 살짝 돌아온 듯한 기분도 들었다. 아마 일시적이었나 보다. 그러나 아직 안도하기엔 일렀다. 금방 돌아온 것 같았던 미각은 또 다시 사라져버렸다.
인간이 신에게 주어진 축복은 오감(五感)이다. 다섯 가지 감각 중 가장 먼저 퇴화하는 것은 시각이며 그 다음 순서대로 각각 청각, 후각, 미각 등, 마지막에 가선 촉각 마저 잃어버리는데 현재 주자서의 상태는 이미 미각을 잃어버릴 단계까지 온 상황에 이르렀다. 그래서 그런가 갑자기 정신이 아득해짐을 받아야 했다. 이에 따라 순간 흐릿해진 시야가 더욱 괴롭게 만들어 주자서는 한 술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반이나 남겼다.
허나, 온객행에겐 차마 이런 비참한 모습을 알리고 싶지 않았기에 끝까지 사람 좋은 표정을 연기하였다. 나중에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얼마든지 나를 욕하고 때리고 화를 내어도 좋았다. 후회하지 않아. 구원이라고? 시덥잖은 소리. 아무런 구원 해주지 않아도 괜찮다. 일단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의 내가 나를 제일 용서할 수 없단 사실이다. 그 앞에서 장성령은 '사부, 벌써 다 드신 거예요?' 라고 물어오고 온객행이 반도 먹지 않아 덩그러니 남긴 밥과 주자서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왠일이야? 많이 남겼네~ 더 안 먹어?"
"뭔가 식욕이 없네~ 딱히 배고픔도 잘 못 느끼겠고-"
주자서는 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아프냐고 질문을 던져댄 두 사람을 안심시키며 잠시 근처 바람을 쐬러 갔다 오겠다는 명목을 들어 급히 피해버렸다. 오래 머물고 있다간 비밀을 들킬지도 모르고 심지어 괜히 민폐를 끼치는 것 같아 미안했다. 게다가 마찬가지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란 이유도 포함되었다.
스산한 밤 거리의 절경을 뚫고 어둠 안에 갇힌 빛이 몇 번이나 백열하다 사라졌다. 한 발 한 발 앞을 향해 내딛은 발의 보폭을 맞춰 담담히 걸었다. 아까 전과 비교해 불안정하게 흔들려 교차하는 수많은 감정이 많이 안정된 기분이어서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종종 아무 생각하지 않고 이리 정처 없이 걷는 것도 나쁘지 않은 듯 했다. 그로부터 약 몇 시진 동안 주변을 맴돌며 서성이다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들어오자마자 반기는 건 기다리다 지쳐 먼저 잠든 두 사람과 탁자 위에 놓인 후식이 보였다. 저녁을 모두 남겨버린 저를 위해 이거라도 먹으라고 몫을 준비한듯 하였다. 온객행의 상냥함은 정말 고마운 일이었지만 쓸데없이 이렇게 마음 쓰지 않아도 되는데.. 주자서가 말끝을 흐린 뒤 탁자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무미였다. 과자를 하나 집어 먹어도 여전히 감각이 없다. 전혀 느끼질 못하니 공간지각 능력을 최대한 사용하여 익숙한 기시감을 기댈 수 밖에 없음을 한탄했다. 이젠 더 버텨낼 자신이 없었다. 조금씩 조금씩 이성이 무너가기 시작하였다. 인간의 주 기능은 '음식을 먹음'으로써 활동이 이루어지는데 어느 날 '섭취'라는 순수 기능의 목적을 잃어버린다면? 진짜 상상조차 하지 못할 공포일 것이다. 그런 공포를 제가 겪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정신적 압박이 오감을 잃는 것보다 좀 더 감당하기 힘들었다.
주자서는 이내 음식을 먹길 그만두었다. 비단 정해진 의무 같은 것은 아니나 인간에게 무언가 영양을 섭취한단 기능이 사라지는 순간부터 그건 더 이상 사람이 아닌 이형의 존재로 변한다. 그저 인간의 형상을 한 괴물일 뿐이라는 것을.. 그가 눈앞에 보인 꽃병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름답고 탐스러웠지만 딱 그 생각에서 그쳤다. 인간으로서 자신이 거대한 운명과 죽음 앞에서 무력하게 부정당했다. 상실감이 박탈된 주자서가 망연히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식물이 전신을 휘감는 기분은 도저히 지워지지 않았다.
이내 흘러내린 투명한 액체는 옅게 펼친 미망을 걷었다. 그 아래, 환상을 삼켜 외로움을 가득 채운 꽃병에 핀 붉은 꽃이 눈물로 얼룩진 채──
"노온.. 노온.. 미안해~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는 내가 정말로... 진심으로..."
목이 매여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호흡이 떨리듯 간헐적인 숨을 깊게 토해냈다. 서서히 감각이 마비되며 인간의 오감을 잃기 직전 예민해진 주자서는 허공에다 공백을 메웠다. 그리고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눈앞에 놓인 열매를 미친 듯이 먹었다. 마주하고 싶지 않았으나 두 눈을 마주해야 할 이 지옥 같은 상황이 견딜 수 없어졌다.
이젠 정말 전부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입안에서 말캉 씹을 때 마다 터지는 과육은 낯설면서도 달큰한 맛에 괴리감을 느낀 채 고통을 호소하며 발버둥쳤다. 퍽 낭만적이다. 어쩌면 아마 그게 마지막으로 느끼는 감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낭만적이라.. 만약 이 세계를 창조한 누군가가 있다면 꽤나 상당히 악취미라고 혼자 생각하였다. 절망 이 외의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혹시 운명을 시험당하는 걸까? 손을 뻗어보지만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듯 희망이 보이지 않는 현실을 한탄하며 주자서는 슬픔을 담아낸 괴로운 표정을 짓는다. 그런 다음 흘러내리는 눈물을 애써 집어 삼킨 뒤 감정을 지웠다.
이딴 허울 뿐인 것들이라면 그냥 받아들이지 않으면 된다. 나는 대체 무엇을 기대했던 것인가. 너무 큰 기대를 한 만큼 그로부터 오는 좌절감은 충격으로 다가와 옥죄인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는데.. 나 같은 건 차라리 이런 행복 따윈 누리지 말아 마땅한 터인데..
어째서, 어째서 너는 나에게 어둠이 담긴 잔에 빛 한 방울을 떨어뜨리려 하는 것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