シア 2021. 8. 29. 20:35

* 중드 산하령의 원작 소설인 천애객의 본편 완결 이후 시점 (스포 주의!) 

* 캐릭터 이미지는 원작 소설 기반이든 드라마 기반이든 어느 쪽으로 봐도 무방함 

* 배경음악 / 오마이걸 - 비밀정원 

https://youtu.be/QIN5_tJRiyY 

 

 

천하 강호를 무수히 숱하게 다 돌아다녔다. 하루가 다르게 몇 시간에 한 번씩에도 자주 사건이 일어나고 먹을 거, 마실 거 등 다양한 음식과 옷, 몸을 뉘어 잠시 쉴, 그런 안정된 공간. 여러 가지 일들을 경험해 왔다. 여기서 조금 더 보태 과장하여 비유하자면 이젠 거의 세상의 이치를 통달한 채 해탈의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봐도 무방하였다. 

그 사이 우리들은 많은 일이 있었다. 또한 온갖 경험을 통해 그로부터 얻은 산물인 새로운 지식을 알았고 갈등하고 부딪히는 과정에서 서로 밀어내고 감정 싸움도 있었으며 고통도 느꼈다. 좋고 싫은 기억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가만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지난 몇 년 간 강호에서 이런저런 시간들이 느린듯 빠르게 훅 지나갔다. 

즐거움을 만드는 건 어디까지나 온전히 자신의 몫이라고.. 예전 어딘가에서 누군가에게 들었던 말이다. 하지만 기억나지 않았다. 누가 나한테 그런 말을 했던 건지 어렴풋이 가늠조차 전혀 되질 않는다. 그건 그렇고, 정말 뜬금없지만 이제서야 갑자기 그 말이 떠오른 것은 무엇일까? 온객행은 한쪽 팔은 팔짱을 낀 채 다른 팔을 들어 올려 손으로 턱을 한번 쓸었다. 

현재 상태는 머릿 속이 새하얗게 질린 것 마냥 백지다. 무슨 영 소질 없는 그림이라도 그려야 할 판이다. 뒤돌아보진 않았으나 뒤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름다운 절경이 잘 보이는 장소에서 곧 익숙한 인영이 너울거리더니 주자서가 옆에 다가와 섰다. 그는 눈동자를 굴려 힐끔 쳐다보다 뒷짐을 진 채 말했다. 

"노온- 역시 여기 있었네~ 무슨 생각을 그리 해?" 

"몰라도 돼" 

"거짓말~ 딱 봐도 뭔가 있는데-" 

"아니거든~ 억측하지 말아줄래?" 

"뭐야.. 설마 아까의 검술 대련으로 삐진 거야?" 

"하아? 그, 그건 네가 먼저 시작한 일이잖아! 비겁하게 뒤치기라니!!" 

"비겁한 수는 쓰지 않았어~ 단지 상황 판단을 잘한 것 뿐이지" 

"그거나 이거나-" 

"어이, 잊었냐? 가장 우위를 차지하겠다고 먼저 내기에서 달려든 녀석이 누구더라?" 

"치- 하여튼 한 마디도 안 져" 

오늘도 티격태격 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끝내 자신이 목표했던 행복을 얻으면서 겨우 손에 넣을 수 있게 된 지금 나쁘지 않았다. 두 번 다시 이 작은 행복을 절대 잃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과거의 과오가 어떻든 옆에서 누가, 너는 혼자가 아니라고 그저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살아갈 의미가 생겼다. 그리고 조금 더 살아보자는 이 세계에 대한 가치를 부여해주었다. 그건 분명 온객행 뿐만 아니라 주자서 쪽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실 어쩌면 두 사람은 서로 닮아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그 속에서 삶과 죽음에 대하여 한없이 갈망해 마지 않았다. 어느 순간 상대에게 이끌려 호감을 가지게 된 계기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인 것은 아닌가 싶다. 
이미 오래 전의 일이 되어버렸지만 주자서는 전 천창의 수령으로 독이 든 못 7개를 몸에 박아 오감이 퇴화하고 마지막엔 무공까지 잃어 폐인에 이르는 칠규삼추정을 행한 뒤 조직을 떠나 자유를 만끽하게 되었다.

이에 반해 온객행은 그 놈의 유리갑이 뭔지, 부모의 죽음 이후부터 망가져 버린 인생은 악귀들이 들끓는 귀곡의 귀곡주가 되고 일생을 항상 복수를 위해 살아온 냉혈한이 되어 있었다. 

저마다 마음 속에 지울 수 없는 상처와 짐을 끌어안은 채 그날 그들은 만났다. 필시 하늘의 운명일까? 그건 아무도 모르겠지. 하지만 단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천창의 수령으로서 보낸 10년이란 세월 동안 수많은 동료들과 주변에 관련된 사람들의 죽음을 봐 오며 점점 삶이 허무해졌다. 그래서 떠났다. 아무런 미련 없이 칠규삼추정을 행하면 3년의 시한부 생활을 살게 된다는 걸 알면서 결코 지금까지 절대 단 한 번도 이리 진심이었던 적 없었다. 

어둠 속의 빛. 이를테면 구원. 그래, 둘의 만남은 그야말로 구원이었다. 랄까.. 한번은 포기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련을 버리지 못해 계속 붙잡아 매달려 있는 건 사실 어쩌면 서로가 서로에게 있어 아무 의미 따위 없는 세계와 정해진 운명 속에서 살아갈 의미를 찾아 상대를 통해 자기자신을 비춰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었다. 그런 뜻에서 온객행과 주자서는 닮은 사람이라 할 수 있었다. 

"만약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아서는 어떤 선택을 할 것 같아?" 

"갑자기 그건 왜 물어봐?" 

"아니, 딱히 별 거 아니야" 

"..... 모르겠어~ 그러나 만약, 정말 시간을 되돌릴 기회가 주어진다면 운명을 바꾸기 위해 무언가의 노력을 했을지도 몰라" 

"그런가" 

"너는 어떻지?" 

"나는 그때처럼 같은 선택을 할지도.." 

주자서는 그만 할 말을 잃었다.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꺼내면 좋을지 대화의 목적도 잃어버렸다. 불안감을 감출 수 없을 만큼 눈빛이 흔들렸다. 종종 이런 무거운 말을 내뱉을 때 마다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아니, 대체 이 자식이 또 무슨 생각하는 거야? 

"지금은 모든 것이 다 잘 됐잖아~ 넌 복수에 성공하고 난 칠규삼추정의 3년 시한부 인생의 유예에서 벗어나 진짜 자유를 되찾았고-" 

"......" 

"괜찮아~ 적어도 나는 멋대로 사라지거나 하진 않을 테니 걱정 마" 

"당연하지~ 난 항상 네 편이니까-" 

하핫, 크게 웃어젖힌 온객행은 호쾌하게 말했다. 간단했다. 진짜 나 자신을 속에 감춰놓고 겉을 드러내기란 꽤 편했다. 지금껏 그리 살아왔기에 모든 사건이 끝나고 진정한 행복을 찾은 이 순간에도 이따금씩 본심을 숨긴 채 굳이 저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주변 상황을 판단하고 '가장으로 꾸며낸 나'라는 주체가 튀어나왔다. 뭐, 일종의 후유증 같은 거다. 버릇이라면 버릇인 셈이다. 

"아서,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나 봐" 

"너 귀신이잖아" 

"왜 거기서 태클 거는 건데! 하지만 아직 이 마음이 괴로운 건..." 

"뭐, 금방 하루아침에 그리 간단히 사라질 리 없겠지" 

"훗- 기분이다. 내가 한턱 사줄 테니 오늘은 밤새도록 실컷 술 마시고 즐기자고?!" 

그는 손목을 휙 잡아 이끌었다. 관성으로 인해 튕기듯 끌려간 주자서가 당황하여 크고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온객행의 넓은 옷 소맷자락을 꽉 붙잡았다. 분위기 전환은 또 얼마나 빠른 건가. 그는 개의치 않은 모습이었다. 한 손엔 부채를 펼쳐 입가를 반쯤 가린 채 말하는 저 유쾌한 목소리는 듣는 이 마저 빠져드는 묘한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상황에선 어쩔 수 없었던 거잖아. 나도 이해 해. 나도 그랬으니까.. 하고 싶은 말이 목울대를 타고 차올랐지만 차마 꺼내지 못했다. 주자서는 하나하나 열거하면 밑도 끝도 없이 너무나 많았으나 그냥 입을 다물었다.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닌 이상 말을 이런 것 따윈 아껴두고 가슴 속에 고이 묻어둬 간직하는 게 차라리 나을 듯 했다. 그게 녀석을 위한 거라 생각했을 뿐이다. 

그 사이 우리들은 벌써 저잣거리에 나가 객잔을 찾는 중으로 이어진 상황에 놓였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오늘 어째 전부 문전성시인 모양이라 처음과 두 번째로 방문한 객잔은 물론, 평소 자주 가던 단골 객잔도 이미 사람들이 꽉 찬 만석이었다. 현재 오후 시간이긴 하나, 어쨌든 아직 저녁이 되기엔 한참 희멀건 대낮인데 어디서 마을 축제라도 있었는지 어디 가든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예정했던 일보다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객잔의 문을 열고 들어온 온객행과 주자서가 주위를 둘러보며 적당히 자리를 찾아 앉았다. 

"전에 한번 와 봤는데 여기도 나름 괜찮아~ 꽤 좋은 술과 맛 좋은 안주를 팔거든" 

"환장했군" 

마구 열을 띈 채 흥분한 온객행을 바라본 주자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댄 후 미미한 웃음을 띄었다. '바보'라고 중얼거리면서 주문을 기다렸다. 쓸데없이 청력도 좋아서 그 소리를 용케 알아들은 그가 '뭐야~ 왜 바보라는 거야?'라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잠시 뒤 이윽고 주문한 술이 나오고 이어 둘은 잔을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리 오래 얼마 가지 못했다. 몇 번 술잔을 기울이다가 이내 탁자 위로 내팽개치고 아예 술병을 들고 마셨기 때문이다. 이번 술이 들어간 다음 술병끼리 다시 쨘, 하고 부딪힌 이후 살짝 취한 기분을 느낀 온객행은 천천히 심호흡을 하였다. 이 취기를 빌어 넌지시 속마음을 툭 내비쳤다. 

"아서-" 

"왜?" 

"너는 언젠가 물었지" 

"뭐가?" 

"이상을 꿈꾸면 그 뒤에 이어질 후회를 감당할 수 있냐고.. 가끔은 후회해도 괜찮다고 생각해" 

머릿 속으로 들릴 리 없을 문장들을 되내이며 마음으로만 혼잣말을 외쳤다. 그러나 주자서는 온객행의 말을 되려 안 받아쳤다. 그 자리에서 굳이 어색하게 티를 내거나 내색하지 않고서 최대한 태연자약히 표정을 유지했다. 

노온,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타인한텐 아무도 이해받지 못할 비밀을 가진 채 그 과거를 숨기기 위해 억지로 애써 아닌 척, 괜찮은 척, 강한 척 망가진 속을 가식적으로 겉모습을 화려하게 꾸며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내가 나 자신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노온-" 

"......" 

"알아~ 즐거움을 만드는 건 어디까지나 온전히 자신의 몫이야~ 그러니까.." 

그 순간 온객행은 깨달았다. 세상 사는 즐거움에 대하여 알려준 이가 누구였는지.. 문득 떠올랐던 아득하게 시야가 흐릿한 기억 속에서 점점 선명해진 장면이 그려졌다. 그는 작게 웃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직시하며 주자서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어 그를 응시하였다. 

다섯 병째 마저 남은 술을 들이켰을 때 온객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너였던 건가' 오직 저만 알아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낮게 낮춰 독백을 한 뒤 그대로 밖을 나가버렸다. 뭐지? 한참 만에 상황을 판단하려 애쓴 주자서가 소리쳤다.

"아, 잠깐- 이거 내가 돈을 내야 돼?" 

분명 자기 입으로 한턱 쏘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밤새도록 마시겠다며 선언한 주제에 생각보다 일찍 끝나버린 술자리도 덩달아 어이 없어졌다. 나 참, 정말이지.. 이럴 거면 귀찮게 뭐 하러 저잣거리까지 나가자고 한 거야-?! 

주자서는 어쩔 수 없이 돈을 세어 탁자 위에 얹지고는 객잔을 나섰다. 객잔 밖에선 그가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뭔가 괜히 본인이 진 것 같은 느낌적인 기분에 분해서 살짝 화를 내자 너는 옅은 미소를 띈 채 검지 손가락을 치켜 세워 붉은 입술에 가져다 댄 채 쉿, 소리를 냈다. 그리곤 그런 이유는 알지 말고 모른 척 넘어가라며 말했을 뿐이다. 온객행은 의문을 품어버린 그 생각을 떨쳐낼 답을 찾았단 만족감에 젖어 돌아가는 길은 매우 가벼운 발걸음이 되었다. 

둘은 어떤 말도 없이 그냥 거리를 걸었다. 가만히 걸음을 나란히 하면 마치 축복이라도 해주듯 어디선가 음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주자서는 온객행에게 먼저 무언가 말을 걸어 볼까 했다가 말았다. 받아주면 또 기어오르겠지. 실없는 농담을 받아주는 건 도리어 이쪽이 사양이다. 하여튼 혼자 좋아서 들떠 있는 꼴을 보니까 왠지 얄미워져서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가 1보 앞으로 더 전진했을 때 온객행이 걸음을 멈춘 다음 주자서를 향해 옆을 돌아보았다. 

"시끄러워~ 또 헛소리 할 거면 집어 치워라"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뻔하지~ 그동안 수년간의 함께 해온 세월이 있는데 설마 내가 널 모르겠냐" 

"역시 아서는 아서야~ 그럼 잠시 좀 미친 척 하고 헛소리 좀 할께" 

"됐어~ 빨리 말해" 

"있는 그대로 손을 뻗고 싶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제발 혼자 모든 걸 끌어안으려 하지 마~ 슬픈 눈동자에 흔들리지 말아줘" 

애틋한 마음이 흘러왔다. 줄곧 이제껏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다. 무거운 짐을 누군가와 나눠 그 감정을 공유할 수 있다는 점이 이렇게나 기쁘고 마음이 안정되는 그 한 마디가 왼쪽 한구석의 심장에 화살처럼 날아와 쿡 박혔다. 바보, 바보- 그건 너도 똑같잖아.. 주자서는 들릴 리 없는 독백이건만 감정은 분명 닿을 거라 생각했다. 확실히 내가 무엇을 원하고 바라는지 녀석은 누구보다 가장 잘 알고 있으니까── 

지나가듯 꺼낸 혼잣말이니 신경 쓰지 말라고 덧붙였다. 너는 별 대단치 않다는 듯 한번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며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 미소에 나는 바보처럼 또 다시 그 상황을 종이 넘기듯이 넘겨버리고 만다. 일렁이며 마주해오는 시선을 거둔 네가 이내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떼어 앞을 향해 걸어갔다. 불현듯 본능적으로 무언가에 이끌려 하늘을 올려다 보았을 땐 푸른빛 채도가 더욱 형형하게 빛나고 눈부신 태양을 가득 삼킨 채 수면 위의 잔물결 같이 구름이 역동적으로 움직였다. 이제 와서 달리 빛과 어둠을 흑백처럼 나누어 버리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짓일 뿐이다. 

적어도 목표하던 이상에는 도착했다고 생각했다. 그를 믿고 깊이 신뢰하기에 지금 소중한 게 어떤 것인가 올바른 정의를 내릴 수 있었다. 판단 가치는 상이하나 그걸 결정하는 건 오롯이 자신의 몫이라는 것을.. 두 사람은 진정 살아갈 의미를 찾았다. 그렇기에 수많은 고난과 시험받는 날들의 연속적인 고리에서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돌고 돌아 주어진 이 행복을 더 이상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현실을 마주한 채 싸워나갈 의지라는 이름의 권리는 좀 더 강하게, 더 깊게 아로새겨 날갯짓하는 한 마리의 새가 되어 날았다. 그 생각이 미치자 왠지 모를 짜릿한 해방감이 감각을 통해 전해졌다. 

주자서는 앞서 가버린 온객행의 뒤를 따라 새롭게 한 발 내딛었다. 눈길을 돌릴려는 찰나, 길 한가운데서 스륵 똬리를 튼 뱀을 바라보다가 퍽 담백함을 녹여낸 웃음을 옅게 담았다. 저 앞에서 빨리 안 오고 뭐 하고 있냐며 재촉하는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