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촬물

바벨

シア 2021. 5. 29. 13:38

* 가이쟈그 천사&악마 AU 

* 주제는 바벨탑 신화 

* 사실 커플링, 논컾 어느 쪽으로 봐도 OK 

* 이번 글은 조금 특별하게 시간적 흐름에 따라 각 인물들의 소설의 시점이 변화합니다. 내용에 대한 해석의 여지는 다양하게 생각해주세요! 



희고 아름다운 깃털을 가진 날개-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지던 것은 이제 사라졌다. 한땐 신의 사자라 불리며 신의 목소리를 대신하여 세계를 전했지만 이젠 그런 것들은 필요 없어지게 되었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은 양 전부 부질 없어졌고 덧없다. 한번 저버린 신뢰를 두 번 다시 되찾을 길 없다. 지금까지 줄곧 지켜온 믿음은 정의와 함께 안팎이 비치는 투명한 유리처럼 와르르 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언제부터 이곳에 갇혀 있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얼마나 오래 있었던 걸까.. 느린듯 빠르게 지나간 시간이 그저 야속하기만 한다. 가물거린 회상 속에서 더 생각하길 그만두었다. 굳이 기억나지 않는 것에 대해 붙잡을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을 뿐이다. 왜 내가 죄인이 되어야 했는지, 어째서 우자의 운명을 받아 들여야만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아직 낯선 공간은 마음 속 깊이 스스로 만들어 채운 쇠사슬이 무겁게 울린다.

짓눌린 공기가 흐렸다. 이따금씩 까악까악, 시끄러운 까마귀 소리나 간간히 들려올 뿐, 평소에는 보통 차가운 정적만이 베어 가른다. 탑을 둘러싼 녹색 넝쿨 식물이 벽 전체를 타고 휘감아 자라났다. 고요한 이 정적은 슬픔과 한숨 섞인 비탄이 탑 안으로 흘러 들어와 칠흑 같은 눈동자에 더욱 고통을 아로새긴다. 거의 한쪽 눈을 가리도록 손을 짚은 후 각인당한 시스트론(유전자의 기능 단위)을 느낀 채 오늘도 피부를 관통하여 예리하게 찔려오는 끔찍한 격통을 전신으로 받아야 했다.


마치 날이 잘 든 서슬 퍼런 칼로 도려내듯.. 

아, 살을 에는 느낌이다. 그렇게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괴로움에 발버둥 치고 또 발버둥 치면서 죽을 수도 없이 애써 목숨을 부지해나간다. 그런 저주니까──


이제 와서 무의미하단 것을 알고 있다. 알고 있지만, 억겹의 시간 동안 또 다시 바보처럼 이어지고 마는 인연의 연결고리. 평행선 마냥 공존하는 선과 악, 대립하는 두 가지의 소원, 그리고 흑백 오류에 빠진 형이상학적인 논리. 파괴를 일삼는 반복된 패턴들을 이어 그은 뒤 점을 선으로, 선에서 면을 창조해 하나의 기하학적 입체를 그려낸다. 그리고 그 도형을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지웠다가 덧그려 만든 이 세계는 희망은 물론, 절망까지 남아버린 평행을 이룬 허무를 쫓아서 우리들은 싸울 의지, 살아가는 의미를 찾아 헤매였다.

본능은 때론 욕망이란 다른 이름으로도 불렸다. 그것이 비록 단순한 허상임을 알면서도 차마 이상을 버리지 못한다. 한낱 신기루처럼 아무리 닿아도 절대 닿아지지 않는 존재. 무언가 목표하던 지점에 드디어 가까워졌다고 느꼈을 때 뻗은 손이 한없이 비참해질 정도로.... 

"그거 알아? 신이 바벨탑을 무너뜨린 이유-" 

"뭘 물어보나 마나 뻔하지~ 당연한 걸 왜 물어?" 

"먼저 물었잖아~ 내 말에 대답만 해~ 그 이유를 넌 알고 있나?" 

"신에게 가까워지기 위해 높이 탑을 쌓았다가 신의 분노를 싸 결국 무너져버린 이야기를 모를 리 없지" 

"넌 어떻게 생각해?" 

"..... 뭐가?" 

어떻게 대화를 이어가면 좋을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나는 잠시 그렇게 뜸을 들이다가 침묵을 지켰다. 가만히 너를 응시하니까 비릿한 표정을 지은 모습이 소름 끼치도록 전율이 일었다. 그러나, 너는 아무것도 아니라는듯 살짝 입꼬리를 옅게 올린 채 다소 광기 어린 조소를 퍼부었다. 

변화의 진화론 따위 예시로 들먹이면서 나를 설득하고 이해시키기 위한 논리와 근거를 제시하여 점점 미혹에 흔들려 갔다. 뭔가 묘하게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이 반박할 수 없었으며 기정사실이 괴롭혀댔다. 아이러니하게도 역설적이다. 

"권능이란 건 종속적일 뿐이야" 

"사람은 언젠가 모두 변해가~ 변화하고 변해가지" 

"미안하지만, 나는 그 '변화'라는 게 의미를 모르겠어~ 솔직히 별로 와닿지 않거든" 

"와닿지 않는다고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고통에 짓잇겨지면 사고조차 달라질 걸" 

"신념은 변하지 않아" 

"신념이 변하지 않는다라.. 결코 장담 못해~ 그걸 네가 어떻게 알고?" 

"몰라~ 그러니까 부딪혀 보는 거잖아" 

"그래서 이루어질 수 없는 허황된 꿈과 이상을 쫓아 지금 이 꼴이냐" 

너는 이후 말이 없었다. 날 쳐다보는 눈빛에는 적개심을 담았다. 그래, 우리들은 생각하는 바도 가치관도 다르니 그럴 만 한 게 당연하다. 몸담은 곳 마저 서로 다른 걸. 처음부터 엮어질 수 없던 존재와의 사이가 지금은 옆에서 조금만 부추기면 간단히 넘어오게 만들기란 시간 문제였다. 그런 생각이 미치자 나는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서 검은 날개를 펼쳤다. 그리곤 뱀이 혀를 날름거리듯 차가운 미소를 흘렀다. 

"외쳐라! 어느 누구도 자신의 마음을 마음대로 할 수 없어~ 난 너의 구원자, 그러니까 하면 돼~ 그깟 어린애 장난 같은 행위를 해버려" 

"...... 나는.. 나는..!!" 

구원자라는 단어가 왜 이리 익숙하게 들리는 걸까. 문득 어떤 무형의 기시감이 느껴져 왔다. 가이는 느린 움직임으로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목이 타는듯한 갈증을 인지했지만 기분 문제였는지 아무런 느낌과 인상도 받지 못했다. 점차 갈라진 목소리에서 그저 마른 침만 계속 삼켰다. 제가 한 이 행동이 과연 잘한 것인가, 옳고 그름을 따지기도 전에 다시 모순이 지배당한다. 그는 악취미다. 운명에 관하여 논리와 가치를 하나씩 열거하고 선택을 종용해 마지막에는 그것을 반쯤 협박 삼아 진실을 강요하였다. 

꽃이 없는 열매를 건넨다. 가이는 선뜻 받아들지 못하고 그가 주는 열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슨 의도인지 몰라 앞뒤 맥락을 파악하려 애를 썼다. 저글러는 의외의 순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영겁 속에서 불살라 바스러져 반 밖에 남지 않아 찟겨진 날개를 어떻게든 몸을 가누려 어깨를 살짝 움직이자 그대로 턱 막혀오는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 가슴을 쿡 부여잡았다. 긴 호흡을 내뱉으며 간신히 녀석을 직시하니 빙글거린 채 한층 여유가 흘러 넘쳤다. 무안하니까 어서 받으라는 말을 얹으면서 내민 손을 여태 내리지 않았다. 거절하기 위해 이러니 저러니 변명을 둘러댈 여지를 고민하다 이윽고 열매를 집어 들었다. 

폐허처럼 무너진 탑 위에 서서 두 사람은 마주보지 않고 서로 등을 기댔다. 그런 다음 꽃이 없는 열매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말캉, 씹는 소리가 났다. 상큼하게 톡톡 터지는 열매의 과육이 부드러움과 산미를 자아냈다. 동시에 입 안에서 특유의 코코넛 밀크의 향이 오랫동안 감돌았다. 전신을 구석구석 스며드는 달콤한 쾌락이 매우 기분 좋았다. 망설임 따윈 버린 고독을 너에게 맡긴 채 그날, 우리는 속박되어 갇힌 새장에서 자유를 보았다. 


에덴의 이상을 꿈꾸는 자여- 
최후의 너는 무엇을 보는가? 


두 번 다시 하늘을 날지 못해 깊은 심연 속으로 좀 더, 좀 더 깊이.. 어둠을 향해 나락에 떨어져 추락하는 바벨의 환상. 이로써 낙원에 이르는 금기를 깨뜨린 자는 우상세계를 거닐게 되었다. 허나,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다고 자신할 수 있다. 

빛무리가 갈망하듯 몇 번 백열하다 사라진다. 적어도 나는 여기에 있다고, 종언 을 건널 판타지는 존재 증명의 가치 정돈 남길 수 있었으리라. 빛을 품어 집어삼킨 어둠이 몽환을 가득 머금은 채 너울너울 일렁거렸다. 결점 하나 없이 완결무결한 푸른빛에 감싸인 쿠레나이 가이를 보면서 저글러스 저글러는그때서야 겨우 깨달았다. 어둠이 빛이요, 빛이 곧 어둠이라는 의미를── 

상처도 아픔도 슬픔조차도 우리들의 목소리를 옥죌 수 없다. 혹시 자유를 찾았다고 하면 정말 그렇게 되는 건가? 이내 푸른빛은 완전히 붉은 빛으로 뒤덮혀 사라져버렸다. 방금 전까지 천사와 악마가 서 있던 부서져버린 탑의 정상에는 정해진 틀을 벗고 울려퍼진 최후의 고결한 영창絶唱(Aria 아리아 : 음악적 용어) 아래, 푸른 꽃잎이 피어 있었다.

마치 새로운 운명을 선택한 그들을 축복하듯이, 그저.. 그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