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의 메론
* 가면라이더 가이무의 4호 라이더인 가면라이더 잔게츠 외전 연극 무대 스포일링 있음! 마사히토의 캐해석은 완전히 공식에 의거한게 아니라 일부 공식과 함께 조금 본인이 생각한 캐해석이 있을 수 있음! 쿠레시마 타카토라와 시즈미야 마사히토 둘 다 잔게츠로 변신하는 멜론 록시드라 이를 바탕으로 나머지 두 사람 사이의 과거는 이런 에피소드도 한번쯤 있지 않았을까 싶어 살짝 설정 날조함~
사람 취향 정말 잘 안 변하는게 참 한결같다는 걸 느낀다. 분명 난 가이무 본편에서 2호 라이더인 바론 장착자 쿠몬 카이토를 좋아해서 바나나 오시인데 게다가 심지어 잔게츠 외전 무대에선 파이몬이랑 글라샤에게 (프로토 타입이라지만 여기서도 바나나가 최애구나) 치인 오시인 내가 마사히토 때문에 어쩌다 메론 연성을 하게 되다니....
물론 카이토가 최애, 타카토라가 차애인 거 맞음
쿠레시마 타카토라가 자신이 원래 살던 도시, 자와메 시로 떠난 뒤 토르키아 공화국 안에 남겨진 시즈미야 마사히토는 이 도시를 떠날 수 없었다. 센고쿠 드라이버 실험에 의한 최악의 사건이 일어난 이날 이후 모든 걸 잃어버렸다.
언제나 검은 정장과 흑발을 한 초록색 행거치프가 인상적인 타카토라와 달리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 하얀 정장과 밝은 브라운 헤어가 특징인 그, 마사히토는 조용한듯한 느낌을 받은 정적의 거리를 터벅터벅 걸었다. 마치 세계 어딘가에서 표류된 기분이다. 오묘한 기분이 된 마음을 끌어안고 마사히토는 그 자리에서 천천히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처음 타카토라를 만났을 때가 언제인가, 가만히 눈을 감은 채 머릿 속의 기억을 되짚어갔다. 기억 속의 루트를 따라 회상을 끄집어내면서 마사히토는 지금 여기 이곳에 도달하기까지 일련의 날들을 하나씩 더듬어갔다.
8년 전 과거로 되돌아간다. 당시 시즈미야 가와 쿠레시마 가는 이그드라실 코퍼레이션의 중추가 되는 엄청 입이 떡 벌어질만큼 재벌가 집안이었다. 이 시절, 타카토라와 마사히토가 한창 20대 초반쯤 되었을 무렵이었다. 생각해보면 그땐 정말 어떤 도전조차 목숨까지 내걸 수 있을 정도로 두려움이 없던, 무서움을 몰랐던,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참 창창한 나이대였다. 젊고 어린 나이지만 둘은 모두 각각 자신의 아버지를 따라 이그드라실의 높은 직위에 있었고 중책을 맡게 되었다.
타카토라는 이그드라실의 스칼라 시스템 관련 업무를 위해 토르키아에 방문하였고 그에 대한 공동 책임자로서 마사히토와 첫 만남이 있었다. 정확하진 않지만 아마 이 시기 어디 즈음에 동생 카게마사를 타카토라한테 소개시켜줬을거다. 그의 동생인 미츠자네의 얼굴은 단 한번도 직접 본 적은 없었지만 자주 미츠자네의 이야기를 늘어놓는다거나 휴대폰이나 지갑 속에서 사진들을 보여줬으므로 어느 정도 간단히 녀석에 대해 기본적인 것만 아는 선이었다.
아무튼 이그드라실의 과학자이자 연구원인 센고쿠 료마가 담당자로 연구 개발 실험을 맡아 주축이 된 이래 타카토라는 언제나 실험장에서 살았다. 원래도 비즈니스에서 늘 냉정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는 편이지만 거의 몇날 며칠을 꼬박 거기서 지새울 일이 많을만큼 감정이 무디어져 이제 실험의 일이 자연스레 익숙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타카토라가 아머드 라이더 잔게츠로 변신하기 위한 기동을 실험했을 때다. 하지만 이 임상 실험은 불안정하여 그대로 실패해버리고 등쪽에 꽤 큰 부상을 입어버렸다.
이 시점에서 타카토라가 한동안 병원 신세를 질 때 잔게츠 기동 실험은 자연히 공동 책임자인 마사히토가 넘겨받았다. 하루 빨리 연구를 속행하기 위해 미완성 잔게츠를 마사히토가 이어받았고 타카토라는 동의하였다. 물론 처음엔 당연하게도 결사반대를 했었다.
"아니, 굳이 왜 그런 리스크를 감수하면서까지 하는거지? 마사히토- 넌 좀 더 자신을 소중하게 다룰 의무가 있어~ 혹시 잘못했다간 자칫 너까지 나처럼 이런 위험에 휘말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글쎄- 그러는 건 역시 타카토라도 마찬가지잖아? 리스크는 리스크야~ 어차피 처음 공동 책임자로 내가 이 일을 시작했을 때부터 이런 위험이 도사리는 것을 정말 감수하지 않았을거라 생각해? 난 단지 우리 토르키아를 위해서, 그리고 전 세계의 인류를 구제하기 위해서 너랑 함께 손을 잡고 행동하는거야~"
"하지만.."
"타카토라- 이미 각오한 바야~ 그러니까 내게도 조금은 무리할 수 있도록 해줬으면 하는데.. 괜찮아! 만약 정말 위험하다 싶으면 곧바로 센고쿠 드라이버에서 록시드를 분리할테니 너무 걱정마~ 후후-"
마사히토는 특유의 밝고 가벼운 눈웃음을 흘리며 한쪽 눈을 찡긋해보였다. 그 모습에 뭔가 괜히 더 어둑한 앞날이 보이지 않은 채 슬퍼지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료마에게서 아직 기술력이 높지 않아 대강 자신의 이론을 옮겨 개발은 했으나 직접 실행한다면 아직 불안정하기 때문에 워낙 위험성이 커 어떤 부작용이나 부담이 올지 모른다고 들었다. 원래 개발 초기 땐 항상 불안한 법이다.
"알겠다. 동의하지~"
내심 불안한 기색을 숨긴 채 타카토라는 옅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런 다음 곧 마사히토에게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런, 그렇게 말해주니 역시 기쁘네! 이해하고 믿어줘서 고마운걸~ 타카토라-' 하지만 그 짧은 찰나, 마사히토의 눈매가 가늘게 떴다. 다소 복잡한 표정을 한 모습을 타카토라는 미처 보지 못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꼭 성공시켜보일거라는 말을 하면서 다시 특유의 눈웃음을 흘렀을 뿐이다.
프로젝트 아크라던가 스칼라 시스템 모두 어디서 왔는지 모를 차원 너머 미지의 공간 틈새로부터 온 헬헤임의 숲에 대항한 것이다. 머지 않아 곧 다가올 세계 멸망 직전에 이르지 않도록, 혹시 만일 정말 멸망한다면 그 이후 헬헤임에서 살아가기 위한 방법으로 마련한 이른바 '인류의 구제 계획'의 일종의 대비책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이 세상, 이 도시에 멋대로 나타나 지퍼같은 크랙이 출현하더니 점차 출현 빈도가 높아짐에 따라 헬헤임의 식물이 이쪽의 땅에 포자를 날려 그야말로 점진적 무한히 영역을 넓혀 헬헤임화가 되도록 만들었다. 껍질은 조금 괴상한 모양을 하고 있지만 안에는 투명한 과육, 우연히 그것을 본 순간 엄청나게 먹고 싶다는 달콤한 유혹을 한다. 그 유혹에 끌어당겨져 헬헤임의 열매를 먹으면 인베스화가 된다. 인베스란 것은 헬헤임 숲 내에서 서식하는 괴생명체, 한마디로 그냥 생각 따위 못하고 생명만 존재하는 괴물인 것이다.
악의가 없다. 그것은 어떠한 무엇도 악의 따윈 없었다. 타카토라가 늘 입버릇처럼 말하는 대사와 같이 이건 정말 아무런 이유 없는 악의였다. 이유, 이유, 이유 없는 악의라.. 대상 하나당 이유가 꼭 있길 마련이었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물건이든 태어난 이유, 싸워나갈 이유, 어떤 때 쓰여야하는지 저마다 다양하게 여러 이유의 정의가 전부 하나씩 갖고 있다.
마사히토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얼마나 크건 작건 각각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줄곧 그것을 믿어왔다. 신이 그 이유를 부여해주는거라 믿었기 때문에 분명 지금까지 이유 없는 것은 절대 없다고 생각해왔을 터다. 하지만 아니다. 아니었다. 세상에 이유 없는 악의는 있었다. 분명 존재하였다. 신, 신이라는게 정말로 있을까? 이젠 아무것도 모르겠다.
밝게 웃으며 떠들었던 말과 달리 마사히토는 결국 잔게츠 기동 실험에 실패해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위험성이 큰데 센고쿠 드라이버가 너무 불안정한 탓이 주 원인이었다. 현재는 이때보다 기술력 면이라던가 여러가지 향상되었다만 이 시절은 진짜 자칫 잘못되어 몸에 부담감이 와 어떤 부작용이 미칠지 꿈에도 생각 못할만큼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혹여 인베스화가 진행될 가능성 마저 있었다. 그래서 다들 이 임상 실험에 매달려 극도로 예민해진 신경이 매우 날카로워 마치 예리한 칼날과도 같았다. 그러니 매일같이 이어지는 실험장 안에서 인류를 구원하든, 제 야망을 채우기 위함이든 간에 어쨌거나 꿈을 꾼다는 것은 타카토라와 마사히토는 물론, 료마 마저 감히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타카토라가 걱정하는 점은 바로 이것이었다. 내 자신의 손에 모든 미래와 책임이 달렸기에 그 임무는 막중할 뿐더러 가장 소중한 사람이 이 엄청난 진실을 안 채 그로 인한 상처받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다. 게다가 두 사람 다 미츠자네와 카게마사라는 누구보다 소중하고 사랑하는, 정말 아끼는 동생이 곁에 있지 않은가! 마사히토도 어렴풋이 그걸 깨닫고 있다. 알고 있기 때문인지라 더더욱 일부러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몰래, 혼자 쓸쓸히..
성격이라 해야되나, 성향이라 해야되나, 비슷한듯 전혀 다르지만 유일하게 이런 점은 의외로 타카토라와 마사히토 두 사람이 참 많이 닮았다.
시즈미야 형제의 아버지 카기오미가 주도한 미완성 센고쿠 드라이버를 이용한 인간의 오버로드화 실험의 뒷배경엔 료마의 기술 지원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결국 아무 소득 없이 대실패로 끝났다. 이에 대한 댓가인 것일까, 마침내 토르키아에서 헬헤임이 창궐했다. 미완성인 센고쿠 드라이버와 록시드 사용이 물리적 힘을 불러일으켜, 아마도 저 둘의 복합적인 이유로 마사히토가 헬헤임에 감염되고 말았다.
"크아아아아악-"
고통스러웠다. '아뿔사!' 감탄을 연신 날려본다한들 깨달았을 땐 벌써 너무 늦었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이유 없는 악의가 자신을 향해 덮쳐와도 마사히토는 적어도 자신이 해야할 일은 모두 했다고 생각하였다. 어쩔 수 없었다. 마사히토는 이미 가망이 없는 스스로를 희생해 마지막 통화 뒤 이내 스칼라 시스템을 가동, 더 큰 헬헤임의 피해를 막기 위해 토르키아를 불살랐다.
게다가 완전히 오버로드로 각성한 마사히토는 이제 사람이 아니었다. 괴물로 변하고도 분명 인간의 형상은 어째서인지 아직 유지했지만 인간으로선 한번 죽은, 죽음을 초월한 존재라 불리는 오버로드 인베스가 되었다. 꽤 인지하고 있건만 본격 자신이 그리 되어버리니까 역시 절망적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서서히 의식이 수면 속에 가라앉았다. 몸이 망가지는데 그 느낌이 제게 있어 부숴지는 조각과 같았다. 모든 것을 잃은 채 오버로드가 된 후 처음 거리를 걸었을 때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라 아로새겨졌다. 그때, 아무 생각 없이 흰색이 상징인 하얀 정장 바지 속 주머니에 양손을 푹 넣었다. 손끝에서 뭔가 잡히는 물건이 있었다. 황금빛의 오르골이었다. 오버로드가 되서 그런가, 감각이 둔해짐과 함께 기억의 파편도 가물해지는건지 도통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겨우 억지로 떠올려보니 그제서야 생각났다.
까마득한 예전 아니면 비교적 꽤 최근 몇 년 전, 또 그것도 아니라면 요 근래 사이였을까, 언제였는지 모를 언젠가, 카게마사가 자신의 생일 선물로 준 것이었다. 오르골의 태엽을 감아 돌린 다음 튕기듯 반대 방향으로 돌려서 풀었다. 잔잔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왠지 슬픈 것이 눈물이 났다. 마사히토는 가만히 오르골을 손에 꽉 쥔 채 강하게 품 속으로 끌어안았다.
이날 이후 마사히토는 희망을 버렸다. 더 이상 인간도 아니니까 살아갈 의미 따위 느끼지 못했다. 채워지지 않는 텅 비어진 마음이 어디 둘데 없이 그저 공허감이 감쌀 뿐이다. 계속 반복되는 일상, 밤이 오고 새벽이 찾아오고 다음날 아침이 새롭게 또 시작되면 자꾸만 잊어버릴듯한 무언가에 잊어버리지 않으려 애 쓰기 위하여 그가 한 행동은 일기를 쓰는 것이었다.
오버로드가 되면 이전의 인간 생활과는 느끼는 감각부터가 다르니 절대 기억을 잃지 않도록 언제까지나 기억할 수 있게 오직 저만의 다이어리를 펼쳐 잔게츠 기동 실험 일부터 지금까지의 일들을 매일 하루에 하나하나 기록해나갔다. 그 모든 건 전부 마사히토 혼자만이 끌어안은 진실의 비밀이다. 가만히 눈을 떴다. 한번 후우, 깊게 심호흡을 내뱉었다.
이젠 폐허가 되어버린 토르키아를 뒤로 한 채 마사히토는 토르키아 공화국 내부에 존재하는 지하 도시, 언더 그라운드 시티로 워프하여 이동하였다. 여전히 많은 자들이 서로 살아남기 위해 각 조직을 만들어 철저하게 죽고 죽였다.
팀 오렌지 라이드의 아임(아머드 라이더 프로토 가이무), 파이몬, 구시온, 팀 바로크 레드의 글라샤(아머드 라이더 프로토 바론), 베리스, 오세, 팀 그린 돌즈의 포라스(아머드 라이더 프로토 그리돈)와 유키무라 베리알 그란슈타인(아머드 라이더 프로토 브라보) 등 청년들은 오늘도 끝없는 운명 속에서 자신을 찾기 위해 싸움을 계속 이어나간다.
마사히토는 덧없다고 느껴졌다. 친구, 아니었던가? 왜 최후의 순간까지 좀 더 나를 의지하지 않지? 난 인류의 미래를 위해선 그게 설령 희생일지언정, 뭐든 할 수 있다. 항상 그래왔듯이 이번에도 또 언제나처럼 혼자서 그 모든 죄와 짐을 끌어안을 작정이었나? 친구라면, 인류의 미래를 위해 같은 곳을 바라보던 우리들이라면 타카토라, 넌 혼자가 아니잖아?
내가 있는데, 내가 네 곁에 있는데 역시 의지가 안 되는걸까나, 조금 믿어주길 바랬다. 타카토라는 자신이 스칼라 시스템을 사용하면 어떻게 될지 잘 알고 있다. 그 통화 내용을 타카토라와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눈 전화의 고백이었다. 조금은 타카토라가 밉고 증오스럽고 원망했다.
휴대폰(스마트폰) 너머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르지만 목소리의 떨림 등을 추측하건대 분명 그는 두려워했다. 자기 혼자라면 괜찮을 것을 다른 누군가, 둘도 없이 소중한 타인이 희생당할거라 생각하면 괴로울 수 밖에 없다. 본인은 전혀 강하지 않다.
지금의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이 약한데다 새로운 자신으로 어떤 변신도 할 수 없다고 느껴져서 그것이 실로 매우 한탄할 뿐이다. 유감스럽게도 말로만 그저 노블레스 오블리주 사상을 강요하듯 말하면서 정작 필요한 때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자기자신이 무척 한심스러웠다. 아직까지도 제 안의 망설임, 그리고 상대의 희생을 가장 두려워하고 있었다.
마사히토는 그런 타카토라의 마음을 이해한다. 하지만 그 이해는 어느 시점부터 서서히 변해갔다. 오버로드가 되기 전 헬헤임의 감염으로 인한 고통이 조금씩 조금씩 그의 사상과 가치관을 부정하게 만들고 지금까지 해온 일들을 깍아내린 채 마치 장난감이 망가지는 것처럼 망가지게 만들었다. 모든 것이 전부 무너져내렸다.
그 속에서 마사히토는 뒤틀리진 않았지만 점점 비틀린 감정이 흘러올수록, 그리 마음을 느끼면 느낄수록 자꾸만 괜스레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긴 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그걸 전부 덮을만큼 필요 이상으로 항상 노블리주 오블레스를 강조하며 세상의 괴로움을 혼자 짊어지려는 타카토라를 누구보다 잘 안다.
그러니까 마사히토는 그가 멋대로 끌어안은 채 짊어지려는 걸, 그 짐을 조금이나마 자신도 함께 지고 싶었다. 두 가지 마음이 서로 크로스 되어 교차했다. 그러나 솔직히 무거운 짐을 같이 지고 싶은 마음이 좀 더 컸다.
근처 아담한 가게가 눈에 띄었다. 일반 가게라고 하기보단 술을 파는 바같은 곳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금방 술 냄새가 가득 주변 공기를 감돌아 확산되었다. 오버로드가 음식을 먹을 필요는 없지만 형식적인 자세를 취해본다. 간단한 주문과 동시에 잠시후 제 테이블 앞으로 달콤한 향기의 술이 나왔다.
언젠가 타카토라가 한동안 토르키아에 머물 때 한번 시즈미야 저택에 초대한 마사히토를 따라서 처음 그의 집안을 방문하였다. 내부를 둘러보다가 카게마사와 간단한 인사를 나눈 뒤 이윽고 홈바 시설이 갖춰진 방으로 들어갔다. 다음에는 타카토라와 미츠자네가 사는 쿠레시마 저택 좀 초대해달라면서....
사실 이그드라실 공동 책임자라는 것이 있어 기업 공적인 일로 몇 번인가 자와메 시에 와 쿠레시마 형제가 사는 저택을 방문한 적 있지만 대부분 가끔 회사 근무 중 잠깐 간단한 점심 식사할 만남 정도라 미츠자네는 좀처럼 만날 기회가 없었던 것도 있었다. '언제 또 한번 자와메 시, 놀러갈께-' 라는 말을 마사히토 특유의 밝고 능글맞은 어투로 빙글, 웃으며 말했다.
다양한 종류의 와인들이 꽤 가득했다. 칵테일 제조에 쓰일 도구들도 보였다. 평소 술을 자주 마시는 편이 아닌 타카토라에겐 전부 그런 것들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약간 이쪽의 취향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설마 집안에 홈바가 구비되어 있을 줄은 몰랐기에 다소 놀라긴 하였다.
"어떤 거 줄까? 피치 크러쉬, 오렌지 블러썸, 아! 괜찮으면 카카오 피즈도 있어"
마사히토의 말에 타카토라가 채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 마사히토는 본인이 추천한 칵테일 마셔보라고 권했다. 미도리 사워라는 이름인데 일종의 메론 리큐르의 한 종류, 쉽게 말하면 메론 맛 칵테일이다. 뭔가 조금 무거운 쪽을 원한다 했더니만 그는 시즈미야 저택을 방문한 기념으로 타카토라가 메론 록시드를 쓰니 특별히 과일 깔맞춤해야 되지 않겠냐라며 그 술을 건네준 까닭이다.
뭐, 나쁘진 않았다만 별 상관없으려나 싶었다. 자신도 동일한 술을 선택한 뒤 타카토라와 마사히토는 미도리 사워를 든 잔을 짠- 건배를 하였다. 부딪힌 소리가 나며 유리잔에 메론 색깔의 녹색 칵테일이 찰랑 흔들렸다. 맛은 상큼했고 차가운 술이 가슴까지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타카토라와의 추억에 잠시 젖은 마사히토가 이윽고 잔을 들어 미도리 사워를 입에 가져가 댔다. 여전히 메론 향과 맛은 그때와 같이 변함 없었다. 그와 술잔을 기울었던 건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두 번 다시 두 사람이 함께 술잔을 나눌 일은 없었다.
시간이 좀 더 흘러 더 바빠진 이들 미래에 기다리고 있던 결말은 잔게츠 기동 임상 실험의 실패, 그 결과 잔혹한 붉은빛과 녹색 빛깔 색채로 물들었다. 서로 다른 공간의 흑백이 대조되는듯 하다. 그 시선의 끝에서 마주 본 배경이 깊은 심연 속에 잠긴 것처럼 아득하고도 아스라한 슬픔으로 바뀌어갔다. 정말 참담하기 그지 없다. 이리저리 휘둘려 마구 유린당하는 이상과 판단과 선택된 운명이 돌아가기 시작한다. 덧없는 암담한 세계가 흔들렸다.
메론의 색을 띈 녹색 환상은 이렇게 몇 번이나 세계의 공간과 배경을 계속 덧칠해나갔다. 마사히토는 다시 메론 칵테일을 들어 살짝 한모금 마신 뒤 내려놓았다. 메론 맛이 난다. 정확히는 맛의 감각을 잃어버린 자신이 예전에 먹었던 감촉을 되살려 약간 이런 느낌의 메론 맛이었을거라 떠올릴 뿐이다. 빙글빙글 입안을 감돌며 상냥하게 붉은 혀의 촉감을 자극시켰다. 흘러나온 침과 함께 목을 타고 빠르게 사라진다.
이내 씁쓸한 표정이 담긴 그 특유의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이어진 문장은 과연 쿠레시마 타카토라를 향한 말이었을까, 그냥 혼자만의 독백이었을까 알 수 없다. 또한 인간의 것인지, 아니면 오버로드가 된 그의 것인지 구별을 알 수 없는 시즈미야 마사히토가 다소 침착함이 깃든 낮은 목소리로 가만히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