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촬물

자신의 색으로 물들일 때까지

シア 2020. 4. 26. 05:52

토르키아 공화국에서 머문지도 이제 1년이 다 되어간다. 오랜만에 시간이 난 타카토라는 마사히토의 저녁식사 자리에 초대 받아 그의 저택에서 개인적인 시간을 보냈다. 그때까지도 한동안 이그드라실 기업의 주임으로써 스칼라 시스템과 프로젝트 아크를 진행하며 센고쿠 료마의 록시드와 센고쿠 드라이버 개발 연구 실험에도 참가하는 등, 아주 바쁜 나날들을 계속 보내던 어느 날이었다. 산더미처럼 하얗게 쌓인 밀린 서류도 확인했고 결제할 보고서 작성도 완벽히 끝냈다. 일도 나름 자기 뜻대로 잘 흘러가는 모양인데다가 최근 잘 가지지 않았던 사원들과의 회식 모임까지 있었다. 

평소 이런 사적인 모임 따윈 그닥 잘 참여하지 않는 편인 타카토라는 잠시 후 오늘 저녁 7시쯤부터 있을 회식에 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물론 오늘은 특별히 크리스마스 기념을 맞이하여 시즈미야 마사히토의 저택에 초대받았으니 그쪽으로 먼저 선약이 잡혀있었던 것도 있고 여러가지 이유로 회식에는 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굳이 가봤자 또 뻔한 그의 아버지 시즈미야 카기오미의 래퍼토리도 들어야 할테고 말이다. 지금쯤 일본의 자와메 시에선 미츠자네는 뭘하고 있을까? 사용인들의 말을 잘 듣고 있을까? 하나 뿐인 제 남동생의 일이 걱정되었고 해외에 있을 부모님 생각도 들긴 들었다.

미츠자네와 전화를 한 뒤 료마에게 전화를 했을 땐 센고쿠 료마는 자기 연구실에서 따로 할일을 할거라 말하며 료마 특유의 미소를 지은 채 씨익 웃었다. 이렇듯 이그드라실의 중심이 되는 중요 직책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회식을 거절하자 다른 사원들이 조금 불평하였으나 곧 윗사람이 참가하지 않는다며 저희들끼리 마냥 좋아라하는 눈치다. 타카토라는 카기오미 때문이라도 일부러 더 가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술이 들어갈텐데 인류 구제 계획을 위해 언젠가부터 자제해온 술을 먹을 생각이 없었다. 가끔 고급스러운 바에서 혼자 와인이나 칵테일 한 두잔 정도는 몰라도 회식을 하게되면 저 시끄러운 각자의 이야기, 귀찮은 건배사, 전부 받아주고 싶은 마음조차 아예 처음부터 없었다. 내성적인 성격은 아니나 현재의 자신은 오직 인류의 미래를 지키는 일만 좀 더 집중하고 싶었기 때문에 그럴 바에야 차라리 자신의 벗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게 더 좋을 것 같단 생각이 미친 타카토라는 그래서 정말 오랜만에 제 친구라 할 수 있는 동료와 함께 조금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떠들어 볼 심산이었다. 

마사히토를 따라 저택을 들어섰다. 토르키아에 머물면서 몇 번인가 와봤던 곳이지만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는 느낌이다. 왠지 자꾸만 낯설은 기분만이 기시감처럼 남았다. 어쨌든 크리스마스 이브이니 나름 제 동료와 함께 한번 이렇게 가져보는 타임이 나쁘지 않았다. 그래도 일단 쿠레시마 가와 시즈미야 가를 이끌 장남으로서 이그드라실 코퍼레이션의 앞날을 이끌어갈 두 중심의 부잣집 자제이기 때문에 특유의 미묘한 감정선도 감춘 채 복도를 지나 식당으로 들어섰다. 마사히토의 동생인 카게마사는 그들과 간단히 짧은 인사를 마친 뒤 이내 2층에 있는 제 방으로 올라갔다. 

식탁에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타카토라는 곧바로 노트북을 꺼냈다. 보고서 서류 작성 마감도 아직 좀 남은 상태이고 얼른 결제해서 윗선에 올려야 할 자료들도 많이 쌓여있었다. 한참 수없이 많은 질문을 던지면서 열심히 머리를 굴린 그가 이내 휴우- 한숨을 지은 채 보던 노트북을 덮었다. 원래 집안에서도 간단한 인사와 안부를 제외하면 서로 아무 말 없이 식사하는 편이다. 그리고 그것은 동료인 마사히토가 있었다고 해서 그의 일상이 딱히 달라질 리 없었다. 

대부분 타카토라보단 마사히토 쪽에서 항상 먼저 말을 걸어오는 편이라 그저 서로 자신의 벗이 그런가보다, 그런 성격이거니 하고 지나치는 편이다.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 마사히토가 식탁 위에 자신이 간단히 요리한 음식들을 올려두면서 먼저 말을 거는 것으로 두 사람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먹어봐~ 내가 요리한 음식들이야~ 너한테도 입맛에 맞을까?" 

젓가락을 집어든 타카토라가 한입 살짝 음식을 떠서 먹었다. 

"괜찮아- 나쁘지 않은걸" 

"그래? 그렇게 말해주니 기쁜걸~ 타카토라는 입맛이 조금 까다로운 편이니까.."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너도 빨리 자리에 앉아라" 

마지막 음식을 하나 더 그릇에 옮겨담아 가져온 뒤 그제서야 마사히토가 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이 한참동안 아무 말 없이 저녁식사만을 이어갔다. 전체 요리가 지난 후 곧 메인 코스 요리들이 하나하나씩 나왔다. 마치 어딘가의 고급 레스토랑에서 먹는듯한 착각을 들게하는 풀코스 요리들이 와르르 쏟아져나왔다. 사용인들이 있을텐데 의외로 마사히토는 요리를 할 줄 아는 모양이었고 그걸 즐기는 것 같아보였다. 그리 생각하며 타카토라는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음식을 먹기만 하였다. 

"올해 이번 크리스마스는 타카토라와 함께 보내게 됐네" 

"그러게.. 마사히토- 저녁 식사에 초대해줘서 고맙군" 

"뭐, 그래도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니까 1년의 특별한 기념일을 좀 더 즐겨봐" 

"그래- 나도 나름대로 크리스마스를 즐기고 있는 중이다." 

"에.. 아닌 것 같아보여" 

타카토라는 음식을 먹던 중 토르키아는 어떠냐고, 살만하냐고 물었다. 마사히토는 그럭저럭이라는 말을 했지만 그것이 거짓말임을 알 수 있었다. 토르키아 공화국은 이전 대국으로부터 독립한 소국이라 아직까지 전쟁으로 인해 많이 피폐해진 곳이다. 이런 아무것도 없는 피폐한 나라를 다시 재건하긴 얼마나 힘든지 그 누구보다 잘 아는 녀석이 절대 모를 리가 없다. 자신의 동료 앞이라서 그저 가볍게 지나가는 투로 던진 사소한 거짓말이었다. 

타카토라는 책임이 막중하다며 또 동료의 문제 마저 혼자 끌어안아버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일부러 배려한다고 안심시킨 것이지만 서로 너무나 잘 아는 사이에게서 눈빛만으로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찰나의 동요함이 마사히토에게 스쳐지나간 것을 타카토라는 이미 눈치챘으나 그냥 모른 척하였다. 힘들지만 그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는 중인데다가 비록 비즈니스적인거라지만 마사히토는 토르키아를 진심으로 마음에 들어하는듯한 모양이었다. 

토르키아의 상위 귀족들은 나라를 방치한 채 방관하였다. 일반 사람들은 살기 굉장히 힘든 최악의 상황에서 국가는 이그드라실이 진행하는 실험장이 되어 타카토라와 마사히토가 프로젝트 아크를 계속 이어나갔다. 아직 록시드와 센고쿠 드라이버의 임상 실험도 꽤 많이 남아있어서 매우 바쁜 날들 뿐이다. 하지만 사실 말하자면 둘 다 모두 이런 생활이 하루하루 견뎌내기 힘들 정도로 괴로워서 버티기 힘들었다. 

이들에게 있어 장차 집안과 회사를 이끌어나갈 존재이다보니 어떻게보면 어릴 때부터 평범한 일상을 하지 못한 채 뭐든지 참아왔던 터라 더욱 그랬다. 오히려 자신의 동생이 더 부럽다고 생각이 들었고 특히 자기보다 좀 더 뛰어난 모습을 보고 있으면 다소 질투도 느꼈다. 지금 이제와서 다 큰 어른이 꽤 나이차 나는 어린 동생을 질투한다고 하면 전부 부질없는 이야기지만 하여튼 그랬다. 그래도 그런 면이 있었다해서 타카토라도 마사히토도 결코 부정하진 않았다. 그저 한낱 어릴 적의 치기일 뿐, 오히려 그런 면이 더 인간답다고 느껴져서── 

본격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이그드라실의 프로젝트에 뛰어들면서 많은 인간 군상을 봐왔고 또 여러 일을 겪으면서 이렇게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싶었다. 때론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일이 생길지라도 그 부당함을 안을 수 밖에 없는 점도 두 사람은 서로 상대를 공감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많이 가까워졌는지도 모른다. 쿠레시마 타카토라는 애써 정을 주지 않기 위해 감정을 없애고 동료, 내 편을 잘 만들지 않았지만 먼저 특유의 상냥한 미소를 지은 채 다가오는 마사히토를 굳이 내칠 이유 따위 같은 건 없었다. 

외로운 타국 생활에서 그나마 위안되는 벗과 오늘은 이렇게 조금이나마 같이 말상대할 사람이 있어서 그들은 저녁식사 자리가 파한 뒤 와인을 마시며 그동안의 회포를 풀었다. 허심탄회하게 속마음을 말하는 이 순간만큼 타카토라와 마사히토는 하나씩 제 안에 있는 억눌린 감정들을 털어놓기 시작하였다. 유일하게 불만을 토로해도 모두 받아주는 사람이 옆에 있으니까 딱히 꺼리낄 것이 없었다. 

"모든 것은 결국 인류를 위해서지" 

"인류를 위해서라지만 굳이 자신을 희생시키면서까지 해도 되는거야?" 

"그게 노블레스 오블리주- 우리들의 사명이다." 

"뭐, 그렇지? 하지만 한편으론 나는 그렇게 생각해~ 자기자신을 희생하면서 인류를 구제해야되는걸까, 살짝 고민하긴 했었는데 말야.. 너를 만나고 나니까 그 방법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어~ 타카토라- 난 앞으로도 계속 인류를 위해서 살아갈거야" 

"그래" 

타카토라는 말 없이 다시 술잔을 기울었다. 오랜만에 술을 마셨더니 기분이 좋았다. 그도 아마 오랜만에 즐겨보는거겠지- 이그드라실의 프로젝트 아크와 스칼라 시스템의 일 때문에 최근 거의 금욕적인 생활을 한 적이 많았으니까 당연히 그럴만도 하였다. 금새 빈 와인잔을 본 마사히토가 벌써 다시 그의 잔에 붉은 빛을 띈 레드와인을 천천히 일정량을 따르기 시작하였다. 투명한 잔 속으로 따라진 레드와인의 붉은 색깔이 마치 핏물같은 것이 앞으로 인류를 위해, 최대한 헬헤임 숲의 침식을 막기 위해 우리들이 흘러야 할 눈물과 어떤 희생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이내 신경쓰지 않았다. 

어차피 미래는 미래의 일, 지금은 아직 크리스마스 이브였고 곧 다가올 운명에 대하여 잠시 생각하지 않도록 마음먹었다. 지금은 그저 주어진 일을 즐기자며, 마지막까지 계속 자신의 색으로 물들일 때까지 타카토라와 마사히토는 절대 운명에게서 등을 돌리지 않고 확실히 마주할 것이다. 그리고 앞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설령 어떤 희생을 치르게 된다고 할지언정, 그들한테 있어 방해하는 무엇을 더 막을 자는 아무도 없다. 디저트로 내놓은 메론이 왠지 초록빛의 메론 록시드처럼 반짝 빛나는듯 하였다. 서로 그닥 별 말을 하지 않았건만 두 사람은 마주본 채 미미한 웃음을 살풋 지었다. 아직 이브였지만 토르키아 공화국에서 처음 맞는 크리스마스의 밤은 더욱 깊어져갔다.